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

by 파란 해밀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하루 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갑자기 내려간 기온이 사람을 더 움츠러들게 한다. 저녁에 어반 스케치 수업이 있는 날인데 오후 4시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슬오슬 한기도 드는 게 수업을 빼먹어도 누가 뭐라고 할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도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오늘 가면 그래도 또 색다른 무언가를 배울 텐데..... 그냥 따뜻한 집에서 그리면 되지, 여기서 그리나, 거기 가서 그리나 마찬가지 아냐?..... 하는 생각이 교차하며 나를 괴롭혔다.





20230313_203700 (1).jpg





집을 나서야 하는 마지막 시각 10분을 앞두고 결국 그림 용품들을 주섬주섬 챙겨 가방 쌌다. 늘 하던 대로 몸이 편한 것보다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나왔지만 생각보다 제법 쌀쌀했다. 막상 집 밖으로 나오니 죽 끓듯 하던 갈등은 찬 바람에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지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하철을 타고나서는 쌀쌀한 기운도 많이 가시고 더 이상 갈등할 이유가 없다.

할까, 말까? 갈까, 말까?를 고민할 때 가장 힘든 것이 집 밖을 나서기까지이다. 일단 문을 열고 나서면 더 이상의 갈등은 없는데 언제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그 문을 열고 나오기까지이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코스가 현관문까지라고 하는 우스갯소리에 격렬하게 공감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20230311_212521.jpg






불과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그것이 참 중요한 갈림길인 것 같다. 모든 실행의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일단 문을 열고 나서면 다시 되돌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가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면 계획했던 일에 조금 더 다가서게 된다. 그로 인해 따라오는 소소한 성취감은 짜릿한 보너스이기에 이 맛에 길들여지면 천 근 만 근 같은 몸을 끌고서라도 현관문을 나선다.

간혹 어떤 날은 그 문을 나서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 동안 마음 편히 쉰 것도 아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 끝에 돌멩이 하나를 달아 놓은 기분이다. 그래서 지극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문밖을 나서는 쪽을 택한다.











젊어서는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하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만큼 늙어보니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젊다고 마냥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아 보아 왔다. 머릿속에는 항상 많은 계획이 있지만 내일 하지, 내년에 하지, 상황이 바뀌면 하지...... 그렇게 10년, 20년 세월을 다 보내고도 아직 계획만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20230308_170306.jpg






삶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결코 거머쥘 수 없다는 것은 공통된 분모이다. 그 가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현관문까지의 거리일 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너머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소박한 행복과 전율이 있으니 어찌 문을 나서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기 기운에도 집을 나섰더니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그리고 돌아왔다. 많이 어두워진 밤, 더 쌀쌀해진 날씨에도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내 발바닥에는 벌써 봄 아지랑이가 꿈틀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