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침 일찍 출근했을 때다. 커피를 마시려고 탕비실을 가는데 근처에 자리가 있는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직원도 평소보다 일찍 출근을 해서 짬을 내어 책을 읽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정 자세로 반듯하게 앉아 다른 사람은 출근하지 않은 둘 뿐인 조용한 사무실에서 이내 사라질 아침의 짧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치면서 본 그 직원의 손에 들린 책이 한순간 빳빳하게 접힌 종이비행기가 되어 내 가슴에 와 박히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후에도 찻 잔 속의 흔들리는 커피처럼 내 마음은 한동안 일렁였다. 다시는 그 직원처럼 두툼한 책을 읽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이불 홑청을 꿰매시던 친정 엄마는 바늘 귀가 잘 보이지 않는다며 번번이 내게 실을 꿰어 달라고 하셨다. 건네받은 바늘귀는 십 원짜리 동전만큼이나 큰데 어째 이게 안 보인다고 하시지? 하며 의아했다. 그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한 엄마의 눈이 내게 찾아왔을 즈음부터 다초점 렌즈를 하고도 오랫동안 책을 읽는 것이 불편해졌다.
길어봐야 20분가량이다. 그조차도 심한 안구건조증 때문에 눈이 어른거리고, 시려서 젊었을 때처럼 닥치는 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근무 중에 들여다봐야 하는 서류나 규정, 모니터를 보기 위해 눈을 아껴야 했다.
젊은 날, 책은 내게 스승이었고, 친구였으며, 쉼터 같은 것이었다. 인생의 열병을 앓고 있던 혼돈의 20대에 책을 읽으며 마음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읽어 댔다. 하루에 한 권, 일주 일에 네댓 권은 읽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어도 눈이 피로한 줄 몰랐다. 눈은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한 방 가득 모이고도 버리지 못한 것은 언젠가 다시 얽어봐야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그 많은 책을 몽땅 정리한 것도 내 눈이 더 이상 그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어느새 내 몸은 내 마음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시나 시조를 배우는 시간이면 그날 수업에서 배운 것을 누가 가장 먼저 외울 수 있는지 손을 들어 시키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후딱 외워서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시를 낭송하곤 했다. 은근 재미있었다.
백 미터 달리기는 맨날 꼴찌를 도맡아 놓고 하는데 시 암송도 일종의 경쟁하는 달리기 같았다. 백 미터 달리기에서 맺힌 한을 거기서 푸는 것 같아 언제나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시를 외우는 것을 도맡아 놓고 하다시피 했다. 한 번 머리에 들어간 데이터는 잘 저장되어 내가 원할 때 꺼내 쓰기에 용이했다. 그때는 기억력의 한계가 무엇인지 도통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공부하는 데 때가 있다. 혹은 공부는 때가 없다. 평생 하는 것이 공부라고 한다. 둘 다 일리가 있다.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의미이기에 획일적인 기준으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말에 절대 공감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나의 기억력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왼쪽 페이지에서 배운 영어 단어가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는 중에 잊어버린다. 분명히 낯익은 단어인데 그 의미가 생각나지 않아 또다시 사전을 찾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참으로 무참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 몇 번을 되풀이해야 하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익어야 겨우 내 것이 될 듯 말 듯하다. 젊은 날, 두세 번 휘리릭 외우면 아예 머리 속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더니, 요즘은 코 끝에만 겨우 스치고 지나는 것 같다.
오랫동안 보고 있으려고 해도 눈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고, 많이 외우려고 해도 그조차 녹록하지 않다. 서점에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 결국 슬그머니 놓고 돌아설 때는 이 서글픈 늙음 앞에 속절없이 작아지고 만다.
여행을 위해 영어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평생 하는 공부이기는 하나, 그 효과와 효율은 젊을 때와는 매우 다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과 더불어 육체의 수고로움도 더 많다. 그러면서 수시로 느끼는 신체의 한계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래, 역시 공부는 때가 있는 거야" 하며 머리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절정의 기능을 발휘하는 젊은 날, 때에 맞춰 최선을 다해 불꽃을 피웠다가 차츰 늙어지면 다 타고 남은 잿불로 내 삶을 데우면서 살아가면 괜찮게 사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놓치고 있는, 혹은 이미 놓쳤을 수도 있는 그때가 나를 너무 비껴가지는 않았는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젊은 날의 휘황찬란한 때는 이제 순순히 보내어 주고, 더 늙었을 때에 비해 아직 젊은 지금 이때를 기꺼워하며 왼쪽 페이지의 영어 단어가 오른쪽에서도 기억날 수 있게 한 번 더, 두 번 더 떠벌거리며 외워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