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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pr 13. 2023

때와 장소





어깨 통증 치료 차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건너는 교차로는 오가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교차로 길모퉁이에는 붕어빵 장수와 목제품을 파는 아저씨가 있다. 좁은 인도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따금 지나다니기가 불편한데도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무로 만든 주걱, 국자, 숟가락 등 온갖 목제품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는 그곳은 마치 작은 시장 같다. 

나도 거기서 볶음 주걱 하나를 사 본 적은 있는데 장사가 쏠쏠한 지 아저씨는 더운 여름, 추운 겨울 가리지 않고 매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도 그 자리를 지나치는데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아저씨는 모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저씨 무르팍에는 커다란 책이 놓여 있고 연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싶어 느린 걸음으로 지나며 아래를 보니 커다란 활자로 쓰인 영어 학습지였다. 중요한 부분인지 드문드문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고,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는지 펼쳐진 페이지는 책의 1/3을 넘어 보였다. 

그 아저씨는 얼핏 봐도 6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일 년 내내 햇빛을 받아서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에 더 나이가 들어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추운 겨울날, 의자에 앉아 점심을 먹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영어 공부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 발자국 지나도록 조금 전에 내가 본 것이 영어 책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하며 눈에 남은 잔상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혹시 한글인데 영어로 잘 못 본 건 아닐까? 애써 충격을 상쇄하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중요 부분에는 아예 빨갛게 인쇄된 꼬부랑글자는 분명 영어였다. 

몇 발자국을 더 걸어가면서 갑자기 아픈 어깨가 땅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이 들면서 자꾸 떨어지는 기억력 탓만 하며 영어가 잘 늘지 않는다고 툴툴거렸던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잠시 주어진 시간에도 길바닥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빠진 기억력 탓만 했지 더 열심히 하려고 애쓰지 않는 내가 염치없어 보였다. 









영어 공부를 하는 아저씨의 그 목적이 갑자기 궁금했다. 이따금 나가는 해외여행에서 잘 써먹기 위한 나와 비슷한 이유일까? 무엇이 아저씨를 저곳에서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는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할 때 실리와 효율을 중시한다. 형식과 명분은 그다음 이야기다. 그래서 공부든 아니든 그 무엇을 하든지 단순히 타이틀을 위하거나 그 자체가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그로 인해 내가 얻고자 하는 목표가 분명하고 뚜렷할 때 힘껏 매진하게 된다. 









그 아저씨도 나처럼 영어 공부의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일 지, 그저 공부하는 그 자체가 좋아서 일 지 나는 알 수 없다. 나와 같을 수도, 나와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찌 되었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머릿속에는 온통 그 아저씨의 영어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영어 책 속에 박힌 꼬부랑 글들이 도깨비풀 가시가 되어 여기저기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은 없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무처럼 내가 키우고 있지 않을까? 남의 불행을 내 행복의 척도로 삼는 급 낮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터무니없이 떨어지는 기억력 때문에 내가 지금 얼마나 좋은 위치와 환경에 있는지까지도 잊어버리고 다른 탓만 한다면 너무 뻔뻔하다.









갑자기 또 수 십 년 몸에 밴 무한 경쟁(?)의 엔진이 급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건 몰라도 방구석에 앉아 그 아저씨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양심을 저 버리는 것 같아 며칠 전에 공부하고도 일찌감치 맛나게 까먹은 영어 문장을 슬그머니 당겨 다시 읽어본다. 

"Those are the times where I should control my emo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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