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온 이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덜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일반 쓰레기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폐기물 처리 업체를 불러 한 트럭을 정리했다. 대형 쓰레기봉투 한 더미가 나갈 때마다 집안 곳곳에 툭 트인 빈 공간이 나온다. 빈자리를 보면서 뭔지 모를 편안함이 마음속으로 잦아든다. 이 맛에 비우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눈만 뜨면 더 정리할 게 없는지 둘러보는 게 일이다.
그러다 문득 가득 쌓인 신발이 생각났다. 하이힐을 즐겨 신었던 때 사놓고는 나이가 들수록 자꾸 편하고 낮은 스니커즈 같은 것만 신다 보니 신발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것들이다. 한 때 특정 브랜드에 꽂혀 옷, 가방, 신발을 많이 샀다. 제법 고가이다 보니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보관을 하고 있었는데 이젠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계속 신을지, 버릴지 한 번 신어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마침 오전에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 볼 일이 있는데 구두를 신고 나갔다. 뒷굽이 8센티이지만 앞에도 굽이 있어 그걸 감안하면 5~6센티 정도이다. 첫째, 둘째 녀석을 임신해서 만삭이 될 때까지도 8센티 힐을 신고 다녔던 거에 비하면 5~6센티는 고무신 수준이다.
그러나 집을 나서 걷기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후회했다. 신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신고 나온 미련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으니 발이 쏠려서 아프고 걸음걸이도 불편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예전에는 이런 걸 신고 어떻게 출퇴근을 했나?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벗은 신발을 조용히 쓰레기통에 담았다. 그리고 나머지 신발들도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 지불했던 금액을 잊고, 멋진 디자인을 잊고, 그걸 신고 한껏 당당했던 내 종아리도 잊기로 했다. 이제는 5센티 높이에서도 내려와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머물렀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마음과 자리를 비우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더 이상 5센티도 허락받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나의 실상임을 오늘 기어이 발이 아파보고서야 알았다. 대신에 그동안 혹시나 하고 품었던 미련은 더 이상 온 데 간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