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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산책할 때.....

by 파란 해밀




말랑은 알록달록 마을로 알려진 Kampung Warna Warni를 염두에 두고 왔다. 브로모 화산도 필수 코스로 많이들 가지만 특별히 예약을 하지 않고 그냥 왔다.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말랑에 와서 하거나 숙소에 문의할 요량이었다. 다행히 숙소에서 먼저 알려줘서 연결해 주는 지프차로 브로모 화산 투어를 가기로 했다.





일반 승용차가 아니라 지프차로 가는 걸로 봐서는 그동안 다녔던 평탄한 길은 아니란 걸 짐작했지만, 차 타는 걸 워낙 좋아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7시에 출발한 차는 복잡한 말랑시를 요리조리 벗어나 드디어 탁 트인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아주 번듯하고 넓은 도로는 아니다. 단지 따개비처럼 붙어 다니던 오토바이로부터 벗어났을 뿐이다.





길은 영락없이 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길인데 가운데 실선을 그어 놓고 마치 두 개 차선인 것처럼 해놓았다. 앞에서 차가 오면 한쪽으로 빠싹 붙어서 다른 차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 양보하며 잘 지났지만 내가 보기에 이렇게 좁은 길을 이등분으로 나누어 차선을 구분한 건 사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두 줄, 세 줄을 그어 3차선, 4차선으로 만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한 시간쯤 달리니 차 타는 걸 좋아하는 나도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땅 위로 솟았다 꺼졌다 하며 가는 자체가 고행이다.

이 좁고 험한 길을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3시에 출발하는 경우는 위험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거의 다 왔다며 화산 정상까지 15분 정도를 남겨놓고 운전기사가 차를 세웠다. 화산 폭발로 인해 생긴 원형경기장(?)처럼 생긴 거대한 홀이다. 화산재로 뒤덮인 그곳에는 잡초들만 무성하다. 조금 전까지 오면서 본 높은 산등성이에 한 뼘도 낭비하지 않고 빼곡히 심은 감자밭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문득 몇 년 전에 갔던 조지아 카즈베기에서 트래킹을 했던 주타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꾸밈없는 자연에 흠뻑 빠져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같은 것은 주타나 이곳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발 아래 검은 화산재가 잔뜩 숨을 죽이고 있다.





잠시 몸을 풀고 다시 차에 올랐다.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곳에는 먼저 온 지프차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걸어 브로모 화산 정상까지 걸어서 다녀오면 된다.


가는 길은 화산재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모래 백사장을 걷는 것 같다. 저 멀리 눈앞에는 유황을 뿜어낸 흔적이 온통 하얗게 산을 덮고 있다.





들어가는 초입에 말들이 보인다. 웬 말들인가 했는데 정상 바로 밑까지 말로 이동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왕복 200,000루피아 라며 나한테도 이내 몇 명의 마부가 따라붙었지만 거절을 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멀미를 그제야 하는 건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간다. 일찍 출발하느라 아침도 건너뛰고 나와서 두 시간 내내 거친 길을 덜컹거리며 왔더니 아무래도 탈이 난 것 같다.





계속해서 따라오던 눈치 빠른 마부는 내가 이상한 걸 알아차리고는 왕복 150,000루피아로 딜을 한다. 사실 거기까지 걸어온 걸 감하면 크게 내린 가격도 아니지만 그 상태로는 계속 걸을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말을 타기로 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조랑말이 걸을 때마다 녀석의 움직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내가 좀 더 가벼웠으면.... 빨리 도착했으면..... 했는데 중간중간 가파른 길이 있었지만 다행히 생각보다 이동 거리는 멀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 화산 분화구까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200미터가량 되는데 오르는 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천천히 오르다가 뒤돌아 주변을 돌아보며 쉬엄쉬엄 올라가니 유황냄새가 진하게 올라오는 게 정상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려주었다.





유황 냄새를 맡자마자 초스피드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얼른 가방에서 마스크를 찾아서 했지만 그러고도 지독한 냄새는 계속해서 내 머리를 찔러댔다.





살아서 꿈틀대는 화산은 처음 보았다. 페루 콜카캐년을 갔을 때는 고도가 3,800이라 눈도 뜨지 못하고 현기증과 구토로 고생을 해서 내가 화산을 보기나 했는지 기억에도 없다.


칠레 이스트 섬에서는 그저 조용히 잔 숨을 고르는 분화구만 보았으니 지금처럼 그렁그렁 대는 화산은 브로모가 처음이다.





브로모는 아직도 삭히지 못한 분노가 남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분화구 아래에서 뜨거운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저 울혈이 가시는 날이 오기는 올까?, 무엇으로 저 치받치는 화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사람이나 산이나 응어리 하나쯤은 다 가슴에 품고 사는가 보다.





유황 냄새에 쫓기듯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말을 다시 타고 왔는데 기어이 엉덩이에 살이 까였는지 쓰려온다. 다시는 안 타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냥 달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폭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서서 빤히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길이 험하지 않고 조용해서 산책하듯 걷기 좋았다.


그러나 한참을 가도 사람이 보이지 않자 슬그머니 겁이 난다. 마침 앞에서 걸어오는 외국인 부부가 보이길래 물어보니,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된다, 밝은 길이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며 위로를 해준다.





용기를 내어 조금 더 걸어갔더니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폭포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드문드문 여행객들이 보여 마음이 놓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대나무 다리를 건너가니 기다란 물줄기를 토해내는 폭포가 나왔다. 현지인들은 그 아래서 물놀이를 했는지 젖은 몸으로 무리 지어 내려간다.





선녀와 나무꾼이라도 나올 것 같은 예쁜 폭포에 한동안 취해있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은 올 때와 달리 은근 오르막이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려고 잠시 멈추어 서니 주변의 푸른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멈추어야 보이고, 보아야 느낄 수 있다. 냅다 달려온 지난날들이 등 뒤에 남겨진 내 거친 숨처럼 들썩거린다.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니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단거리 경주하는 사람처럼 달려오느라 제대로 잘 보지도 못하고 살았구나.


간간이 현역 선수(?) 시절의 기질이 고개를 쳐들 때가 있다. 이만큼 늙어보니 조금 천천히 가도 별 것 아닌데 고약한 성질이 브로모 화산처럼 그렁대었던 것 같다.





쉬다 걷다를 반복하며 출구로 나오니 머리 밑에 송골송골 땀이 차 있다.

이젠 쉬엄쉬엄 가도 되지 않나?

산 그늘 아래에서 땀도 식히고, 나뭇잎 사이로 들리는 새소리에 귀도 내어 주고.....


잘란잘란.

이젠 내 삶을 산책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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