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은 브로모 화산과 벽화마을을 보고 나면 딱히 갈 만한 데가 없다. 그래도 이틀 만에 가방을 싸서 이동하는 게 힘들어서 4일을 묵기로 했다.
여유가 되는 시간은 그림이나 그리며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브로모 화산을 다녀온 후유증이 그다음 날까지 이어진다. 왕복 4시간 동안 흔들리는 차를 탄 것이 마치 종일 중노동을 한 것처럼 온몸이 뻐근하다.
그래서 다음 날은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매일 달성해야 하는 영어 미션 수업을 듣고, 이것저것 일을 보고 나니 두 시가 지나고 있었다.
오다가다 본 근처에 있는 차이나 레스토랑에 가보았다. 갑자기 자장면이 확 당겼지만 그 흔한 자장면, 짬뽕 이런 게 없다. 두부 수프와 오징어 요리를 시켰는데 가끔씩 가던 우리 동네 중국집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점심을 먹고 산책 삼아 동네를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곳은 시내에서 제법 벗어나 있어서 조용하다. 중상층 이상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집들도 하나 같이 크고 번듯하다.
주택가인데도 도로가 왕복 4차선 급으로 엄청 넓다. 고속도로도 이보다는 넓지 않던데 또 계산기를 들이대는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시내 도로는 운전수들의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좁은데, 주택 밖에 없는 이곳의 도로는 왜 이렇게 넓어야 하는지 암만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더 우스운 것은 그 넓은 도로에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가 없다는 것이다. 도로 바로 옆은 주택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이어져 있은 뿐 사람은 그저 자동차와 오토바이 사이로 눈치껏 다녀야 한다.
사람은 적당히 알아서 재주껏 살아남으라는 것 같아서, 눈치껏 길을 건너고 요리조리 가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스타벅스가 나온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해거름 녘이다. 이곳은 저녁 다섯 시만 되어도 벌써 어두워진다. 아침 7~8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4~5시에 퇴근하는 이유가 그래서 인 것 같다.
숙소에 돌아오니 호스트가 말랑 외곽에 있는 가 볼만 몇 군데를 알려준다. 딱히 계획한 일도 없어서 다음 날 차량을 렌트해서 나가보기로 했다.
박물관. 작은 사원과 정원이라는데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 초입에 조화로 잔뜩 꾸며놓은 것을 보아도 그러려니 했다.
조금 더 전시장을 들어가면 각종 생화와 식물들로 꾸며 놓은 곳도 있다. 각종 야채와 화초를 구역별로 나누어 재배하는 곳은 흥미로웠다.
실외로 벗어나면 각종 유실수들이 설명과 함께 심어져 있지만 까막눈이라 글을 봐도 모른다. 단지 그림이 그려진 팻말이 걸려 있어서 무슨 나무인지 짐작만 할 뿐이다.
한국에서도 사과나무, 배나무, 감나무조차 구분하지 못하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그게 그것 같은 잎사귀만 보고 알 턱이 없다.
한참을 가다 보니 난데없이 예쁜 집이 나오길래 무작정 들어가 보았다. 따라 들어온 직원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내가 못 알아듣고, 내가 하는 영어는 그녀가 못 알아듣는다.
대충 눈치로 파악해 보니 옷을 대여해서 입고 사진을 찍어 주는 곳 같았다.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마침 시간도 넉넉하고, 가게에 다른 손님도 없어서 해보기로 했다. 늙으니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해볼까?를 가지고 오래 고민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젊은 날에 하지 못했던 귀 피어싱을 환갑 기념으로 했다. 꼭 해 보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못했는데 구멍을 미리 뚫어 놓으면 나중에 죽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타겠지 싶은 마음으로 했다.
수 십 년을 무서워서 못했던 피어싱은 막상 해보니 아프지도 않고 간단하게 끝난 것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몇 십 년 동안 미련만 갖고 있었으니 참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기념 삼아 사진 한 두 장 찍어볼까 하고 시작했는데, 직원은 너무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를 끌고 다녔다.
사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여행을 가서도 내 사진 하나 없이 돌아올 때도 있다. 이번에도 그저 귀에 피어싱을 하는 마음으로 해보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한두 장 사진을 찍고 나서 전화기를 돌려받으려는데 직원은 못 알아 들었는지 각종 포즈를 알려주며 취하라고 한다. 심지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여기저기서 또 사진을 찍는다.
이젠 됐다, 충분하다고 하는데도 직원은 막무가내다. 그녀는 연신 내게 스마일을 외쳤지만 나는 입이 굳어서 더 이상 웃을 힘도 없다.
또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것을 양 팔로 가위표를 크게 그리며 강력하게 거부하고 나서야 겨우 끝을 낼 수 있었다.
와이어가 주렁주렁 박힌 패티코트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고 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내 옷을 갈아입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잠시였지만 그 시대 그런 옷을 입고 살았던 여인이 되어 보기도 하고, 멋진 옷을 입고 선망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모델이라는 직업도 참 녹록한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내 팔자가 마님 팔자가 못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쭉쭉 늘어나는 츄리닝 바지를 입고 벅벅 마루 걸레질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새삼 알 것 같았다.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 저 건너편이 더 행복할 것 같아도 결국은 돌고 돌아 내가 있던 자리에 파랑새가 있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벗고 나니 그 옷을 입기 전의 내가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알 것 같다.
오롯이 다시 돌아온 내 자신이 행복한 것을 아는지 갈아입은 바짓단도 더운 바람에 설풋 들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