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자에서 말랑으로 가기 위해 밤 1시 40분 기차를 탔다. 한국에서 기차표를 예매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밤 기차 밖에 없다. 잘 못 본 게 아닌가 해서 아무리 아래, 위를 훑어보아도 저녁과 한밤중에 가는 두 편 밖에 없다.
저녁에 출발하는 건 말랑에 새벽 3시경에 도착이고, 나중에 출발하는 건 아침 7시에 도착이다. 혼자 다니다 보니 가급적 안전하게 이동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럴 때 혼자라는 것이 제일 아쉬운 순간이다.
족자의 숙소가 긴 골목 안에 있다 보니 어떤 운전기사는 위치를 잘 못 찾는 경우가 있어서 골목 밖으로 나가서 차를 부르기로 했다. 숙소에서 역은 가까워서 12시 반쯤 나가도 되지만, 그 시각은 너무 늦어서 혼자 움직이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다. 이것이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난제다.
하는 수 없이 출발 시간 3시간이나 앞두고 주변에 불빛이 있을 때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관광지답게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대합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속을 태우던 사람이 전혀 아닌 것처럼 나도 그들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앉았다.
혹시나 역을 놓칠까 봐 맞추어둔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창 밖에는 새로운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탄 기차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다 깨다 했는데 어쨌든 말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지겹고 고단한 밤 기차가 말랑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오토바이 아무거나 집어 타고 숙소를 향했다. 가서 제대로 눕고 싶었다. 몸이 천 근 만 근이다.
예매한 숙소는 모녀가 운영하는 곳으로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람 손이 많이 가서 잘 관리되고 있는 곳처럼 보였다. 아침 8시에 도착했는데 방 청소가 끝나는 대로 체크인을 해주겠다고 한다.
아침도 혼자니까 추가 비용 없이 제공해 주겠다며 방 청소가 끝날 때까지 아침을 먹으라며 후딱 한 상을 차려준다. 많은 리뷰에서 본 것처럼 친절하고 일 처리가 빨라서 참 좋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샤워를 하고 대자로 길게 뻗었다. 한두 시간을 겨우 잤을까? 아무리 피곤해도 몸은 대낮이라는 것을 어찌 아는지 깊은 잠이 들지 않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내로 가 보았다. 말랑을 선택한 이유가 벽화마을을 보기 위해서다. 마을 입구에서 입장료 5,000루피아를 지불했다. 들어서자마자 알록달록한 집들이 늘어서 있다.
초입에서 잠시 느꼈던 색색깔의 마음이 주춤해진다, 사람 한 두 사람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좁은 골목길과 바로 이어진 그들의 방과 부엌을 보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입장료 5,000루피아를 냈다고 그들의 사생활이 비치는 곳을 마구 휘젓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 나가기로 했다.
다시 큰길 쪽으로 나오려는데 동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저런 숨바꼭질을 언제 해 보고, 언제 보았나 싶다. 이곳의 아이들은 아직 저린 숨바꼭질을 하고 노는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몰래 빙긋 미소가 지어진다.
노는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었더니 어느새 달려와 더 멋진 포즈를 취해준다. 아이들의 천진함이 벽화처럼 예쁘다.
찍은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인사를 나누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꼬마들이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숨바꼭질을 한다. 한 번 술래였던 제일 작은 꼬마가 자꾸 술래를 한다.
남의 나라 룰을 모르니 그런가 보다 하면 될 일을 언니, 오빠가 어린 동생 등 쳐 먹는 건 아닌가 싶어 가면서도 자꾸 뒤가 돌아다봐진다.
저만한 동생을 유모차에 태우고 조금 더 크다는 이유로 언니 노릇을 하느라 울퉁불퉁한 길에 힘든 내색도 않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어린 소녀가 대견하다.
옛날에는 우리도 그랬었다지.... 큰 언니가 작은오빠를 업어 키우고, 둘째 언니가 막내 언니를 데리고 놀고..... 서로가 서로에게 엄마처럼 친구처럼 그랬었다지.....
막상 들여다본 마을은 사진으로 보고, 멀리서 본 것과는 사뭇 달랐다. 현장에서는 사진으로 읽히지 않는 삶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얼굴의 기미를 가리려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인처럼, 그들도 어쩌면 가리고 싶은 궁핍을 화려한 원색으로 덧입혔을 것이다.
단 돈 5,000루피아에 모든 속을 훤히 다 내어준 그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걸었다. 더 이상 집 내부가 들여다 보이는 골목은 가지 않고 큰 길만 따라 걷다 보니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를 건너니 또 다른 마을이라며 통행료 5,000루피아를 내라고 한다. 앞 마을보다 작아서 오래 머물 것도 없이 길을 따라가니 출구가 나온다.
출구를 돌아 나와 길 건너에 보이는 스머프 마을로 갔다. 입장료를 내는 입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도로와 이어진 길이 보이길래 무작정 내려가 보았다.
그곳에는 사내 녀석 몇 명이 공차기를 하고 있다. 잠시 그들을 보고 있으니 녀석들이 공을 차다 말고 또 나를 원숭이 취급을 한다. 아이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가다 보면 입장료를 받는 사람이 나오겠지.... 했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중앙으로 간 게 아니고 한 구석으로 들어가서 그런가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 끝에 도착했다.
스머프 마을은 앞서 본 마을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반듯한 것 같다. 시간을 내어 다시 한번 파란 마을을 둘러보며 그림 그리러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다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 남겨진 두 마을을 가만히 뒤돌아보았다. 파란 마을에도 알록달록 마을에도 그들의 색깔 같은 삶이 지붕마다, 창문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낡고 허름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보금자리인지 곳곳에 스며있는 손 간 자리가 선명한 스탬프 자국처럼 자랑스럽게 꾹꾹 찍혀 있다.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