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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촌년

by 파란 해밀




말랑에서 4일을 보내고 수라바야로 왔다. 기차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라서 족자나 말랑으로 이동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동안은 옆 좌석에 아무도 없어서 편하게 다녔는데 이번에는 현지인 아가씨가 먼저 앉아 있다.


마침 영어가 가능해서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생활 풍습이나 히잡, 직업, 여행 등 서로가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수라바야에 도착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훅~~ 하고 더운 기운이 밀려온다. 그동안 머물렀던 곳과 비교해서 제일 더운 것 같다. 덥다기보다는 따갑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했다. 조용하고 방도 넓고 쾌적해 보였다. 캐리어와 백팩을 내려놓고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방에 붙어 있는 스위치라는 스위치는 전부 다 켰다 껐다를 했지만 허사다.


몇 번을 시도하다가 아무래도 고장인 것 같아서 리셉션에 얘기를 하려는데 문 옆에 있는 전자키 꽂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부 열쇠만 사용하다 보니 전자키를 받아 들고도 사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참 대단한 적응력이다. 전자키를 꽂고 나니 그제야 방이 환해진다. 며칠이나 되었다고 아무것도 아닌 걸 홀랑 까먹은 내가 어이없어서 빈 방에 혼자 앉아 혀를 차며 웃었다.






수라바야는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내 습관은 그전에 머물렀던 소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고층 빌딩이 새삼스럽고 어색하다. 그런데도 낯익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 빽빽한 빌딩 숲을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도 그것을 다시 보니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익숙함을 지루함으로 여기고 벗어나려 한다. 먼 길을 떠나와 보니 그 익숙한 것들은 자주 입어서 편안한 옷처럼 받아들여진다.


일부러 의식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고, 내 안에 침잠해 있는 나의 일부였던 것이다. 떠나보고 잃어봐야 나의 옛 자리가 소중함을 알 듯이,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나는 익숙함의 가치를 복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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