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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un 30. 2023

자유로운 생각



에릭 요한슨 사진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의 사진은 주어진 피사체를 단순히 찍는 것을 넘어 피사체를 만들기도 하고, 상상력과 편집을 더해 사진 그 이상의 의미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작품 하나, 하나를 볼 때마다 그의 기막힌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액자 옆에 있는 타이틀을 보지 않고, 작품을 먼저 감상한 후에 나름대로 주제를 생각하고 나서 타이틀과 맞춰보기도 했다.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와 나의 생각 차이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었지만 같고 다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오랜만의 신선한 놀이였다.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미술 시간에 같은 반 언니 친구가 하늘을 빨간색으로 칠을 했다. 그랬더니 체육 전공이었던 남자 담임 선생님이 그 그림을 보고는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너는 하늘에 불이 났냐? 왜 하늘이 빨개? 하늘색으로 칠을 해야지"

그 친구는 선생님의 불호령에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언니가 집에 와서 그 일화를 얘기했는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도 언니 친구가 느꼈을 무참함과 그 교사의 무지의 소행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미술 학원을 보낸 적이 있다. 피아노는 시큰둥했지만 둘 다 그림 그리는 것은 좋다며 다니겠다고 했다. 어느 날, 일이 있어 반차를 내고 학원 근처에 갔다가 마침 녀석들 수업 시간이라 학원에 들러보았다.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궁금했다. 학원을 들어서니 막 수업을 시작했는지 이젤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학원 내부를 잠시 둘러보고 선생님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 방식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는데 이젤 바로 옆에 걸려 있는 교본을 참고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그리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려보면서 얻는 학습 효과도 분명 있으니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던 기대와는 달리 다른 수업 방식은 없었다. 오로지 남이 그린 작품집을 보고 따라 그리면 최종적으로 선생님이 마무리하는 것으로 수업을 한다는 것이다. 학생에게 주제를 주고 스스로 그림을 구상해서 그리게 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아이들이 힘들어해서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상상한 그림을 그려왔고, 그것이 당연하고 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미술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그곳에서 그림 그리는 테크닉은 배울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들의 상상력을 굳어버리게 할 것 같아서였다. 아들들은 그곳에서 배운 테크닉으로 미술 대회에 나가 몇 번의 상을 받아왔지만 나는 그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런 교육의 문제가 드러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둘째 녀석이 서재에서 이것저것 찾더니 나한테 와서 물었다







"어머니. 혹시 화보집 같은 것 없어요?"
"그건 왜?"
"학교 숙제가 있어서요?"
"무슨 숙젠데 화보집을 찾아?"
"고무 판화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참고하려고요"
"네 나름대로 주제를 떠올려서 거기에 적당한 걸 상상해서 하면 되잖아?"
"그렇게 안 해 봐서 잘 생각이 안 나요"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주어진 교본으로 편하게 베끼는 그림만 그렸으니 상상하는 훈련이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난감해하는 녀석에게 유화 화보집 있는 데를 알려 주고는 녀석이 숙제를 어떻게 해갔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른이 아이들의 빨간 하늘을 기꺼이 수용하고, 상상할 기회와 시간을 주고 기다려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차라리 미술 학원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미술 대회 상장 몇 장 대신 상상력을 조금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했다.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도 상상력이 필요하고, 그 상상력을 위해 많은 반복과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틀에 박힌 생각에 갇힐 수밖에 없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자유로운 생각의 표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습이 필요할까? 생각이 자유로울수록 다채로운 아이디어와 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듯이 생각이 자유로워야 다양한 각도의 뷰를 볼 수 있다.

때로는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고, 눕혀서도 보고, 빛의 양에 따라서 달리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단순한 사물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이어지고, 그 생각으로 인해 내 삶이 바뀔 수도 있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각과, 생각은 인생의 가장 기초가 되는 퍼즐일 것이다.







나의 다양한 생각과 상상이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처럼 거창하게 이어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어놓은 한정된 선 안에 갇히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물기를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철판 같은 사람이 있다. 그 모든 것이 생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의 기울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평소 다양하게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연습을 하다 보면 보다 폭넓은 이해와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하면서, 이해와 소통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에릭 요한슨의 작품을 보면서 생각의 힘과 그 찬란한 결과에 짜릿함을 느꼈다. 그것이 작품을 하는 예술가든 아니든, 생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엄청난 위력 앞에 꼬장꼬장한 내 생각이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것인지 부끄러워졌다.







하늘은 반드시 하늘색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박힌 어느 교사의 무심한 한 마디가 어린 학생의 상상력의 가지를 단번에 잘라버리고, 타성에 젖은 교육이 학생에게 상상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아이들을 획일적인 생각의 절름발이로 만드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근육도 쓰지 않으면 퇴화하듯, 생각도 하지 않으면 그쪽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막히게 되고, 틀에 박힌 편협된 생각으로 누군가에게 잘못된 관념과 상처를 주는 과오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에릭 요한슨의 사진 하나, 하나에 담긴 그의 짜릿한 상상이 날카로운 바늘 끝처럼 나를 찌른다. 무한대로 펼처진 상상력에 자석처럼 이끌릴 때마다 나는 부르르 떨었다.


잠자고 있던 내 생각의 게으른 먼지를 툭툭 털고, 길게 길게 생각 스트레칭을 하면서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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