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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Oct 09. 2023

시작을 돌아보다



우연히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평생 학습관의 영어 회화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았다. 퇴직하자마자 등록했던 비슷한 강의에서 학습 방식에 많이 실망했던 적이 있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집에서 가까운 곳이고 무료 강의여서 어떤 곳인가 하는 호기심에 접수를 했다. 학습 주제가 여행 영어라서 그런지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접수를 했는데 운이 좋게도 수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강 첫날, 교실에 들어서자 강의실은 이미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평일 오후에 하는 수업이라 젊은 사람들보다는 40대에서 5~60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영어에 대한 열의는 20대 못지않게 뜨거웠다. 







수업이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면서 계속 수업을 들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갈등을 했다. 오로지 회화에 관심이 있었는데 여건상 일방적인 수업이었고, 수강생들의 실력 편차가 심해서 그렇게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첫날 수업을 마칠 때까지 이럴까 저럴까 고민을 했다.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것 아닐까? 그 시간 동안 차라리 혼자 공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강사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갈등은 두 번째 수업에도 있었지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을 정했다. 







유려하게 영어 회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강의실에 가득 찬 다른 사람들의 열의를 느끼는 것도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그들을 보면서 느슨해지던 마음을 다 잡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마음과 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수강생들을 보면서 나도 그랬던 나의 처음이 생각났다. 입 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차마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영어가 답답하고 원망스러웠던 암담했던 그 처음이 떠올랐다. 

겨우 단어 몇 개로 의사 표현을 하던 내게 한 문장을 구사하던 사람이 얼마나 우러러 보였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다지 대단한 문장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 내게 그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빠져나오는 내게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하고 묻는 어느 수강생의 물음에 예전에 내가 품었던 부러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여전히 부족하고 잘 느는 것 같지 않아 이따금 때려치울까? 하고 고민을 했었는데 시작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오랜만에 나의 서툰 시작을 보았다. 

하루하루는 느는 것 같지도 않아 지루하고 속상해서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지만 문득 되돌아본 나의 처음과 비교해 보니 어느새 성큼 자라 있었다. 







선선한 바람을 쐬며 잠시 걷는 것에 기뻐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학교 가듯 기꺼운 마음으로 가기로 했다.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배울 것이 있고, 공부하려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나도 덩달아 데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고 있었던 나의 처음을 들추어 보며 느슨해진 현재의 나를 조이고 닦을 수 있었다.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으면 느리더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이 버벅거리며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과 그들보다 조금 덜 버벅거리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그저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세월의 차이가 전부였다. 







하느라 해도 쑥쑥 느는 것 같지 않은 신통찮은 영어를 때려치울까 하는 마음을 그들을 보면서 다시 주워 담았다. 아무 말도 못 했던 영어 천둥벌거숭이를 떠올리면 지금의 내가 여유롭게 빙긋 웃을 수 있는 것처럼, 이 시간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또 좀 더 나아진 내가 지금의 나를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위로를 했다. 

이따금 살다가 내 앞에 놓인 장애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 잠시 뒤를 돌아 예전의 나를 한 번 떠올려 보면 그때보다 훨씬 커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툭툭 먼지를 털고 다시 가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소박한 책가방을 꾸려서 느리고 더디지만 가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한 걸음, 두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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