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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Sep 27. 2023

늙은 취미를 담글 때




삼십 대 중후반쯤이었으니 25년 전이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때라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퇴근하고 나서 일주일에 한 번 문화 센터에 그림 그리러 가는 것이었다. 그날은 무거운 화구와 캔버스를 들고 출근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신바람이 났다. 그만큼 그림은 내게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러나 가끔 어려움을 맞을 때가 있었다. 대부분 문화 센터 수업이 무리 없이 진행되었으나 가끔 인원이 부족해서 폐강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다. 어느 학기에 유달리 수강 신청자가 없어서 그대로 있다가는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회사 사내 게시판에 그림 수업에 대한 홍보 글을 올렸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간절했다. 생각 외로 네 사람이 신청을 해서 폐강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신청자 중에는 40대 중반의 남자 선배가 있었다. 그는 스포츠 마니아로 등산, 암벽 타기, 마라톤 등 다양한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어서 실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개강 첫날, 그에게 물었다.

"평소에 그렇게 운동하는 걸 좋아하시는데 어떻게 그림 그릴 생각을 하셨어요?"
"지금은 아직 젊으니까 운동을 할 수 있지만, 나중에 다리에 힘 떨어지면 못할 텐데 그럴 때 대비해서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그의 대답을 듣고 마치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그의 말을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집에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문득 그 선배의 말이 불쑥불쑥 되살아난다. 


나는 동적인 활동보다는 정적인 취미가 훨씬 많아서 나이 들수록 딱히 일부러 준비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젊었을 때보다 그 가치가 더 소중한 것을 넘어 감사하게 받아들여진다. 









직장 다닐 때도 시간을 죽이는 모임이나 만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최소한 꼭 필요한 자리만 참석을 했다. 퇴직 후에는 그조차 할 필요가 없으니 그만큼 혼자의 시간이 많아졌다. 늙을수록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 보면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무료하거나 지겹지 않다. 그러면서도 생산적이고 그 안에서 성취감과 도전 의식을 느낀다. 

젊어서는 그저 좋아서 시작했던 그림이 늙어서는 진정한 친구 이상의 가치가 있다. 어제는 무심코 "그림 그리길 참 잘한 것 같아" 하며 혼자 읊조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만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취미도 나이를 먹는 것 같다. 긴 겨울을 대비해서 김장을 하듯, 나의 긴 노년을 위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묵은지 같은 취미 하나는 손에 잡히는 연금처럼 꼭 쥐고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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