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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pr 23. 2024

내가 이해할 차례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회사 선배로부터 느닷없이 연락이 왔다. 딱히 이렇다 할 공통분모가 없어 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근무하면서 간간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라 오랜만에 받은 연락이 반가웠다.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와서 만날 적당한 때를 생각하던 중에 그녀로부터 긴 문자가 왔다. 자식에 대한 배신감에 매우 상처를 받았다는 문구가 무겁게 전해지며 뭔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싶은 상황 같아서 가까운 시일에 만나기로 했다. 





© kelli_mcclintock, 출처 Unsplash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에서 만난 그녀는 많이 지쳐 보였다. 온몸으로 힘든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뜰하고 자상한 아들이었는데 결혼 문제로 의견 차이가 있으면서 이런저런 오해와 서운함이 있던 터에, 그녀의 의사에 반해 아들이 모든 일정을 진행하면서 마음을 많이 다친 것 같았다. 

자식을 키우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부모는 날아다니는 줄 알았다. 대학만 들어가면 룰루랄라 어깨춤을 추며 살 줄 알았다. 성인이 되었으니 반듯한 생각과 행동으로 더 이상 부모가 신경 쓰지 않아도 당연히 제 길을 잘 개척하며 사는 줄 알았다. 





© srphoto, 출처 OGQ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자식이 대학을 졸업해서도 심지어 결혼을 하고 나서도 부모를 걱정하게 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더 크고 무거운 걱정을 끼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 주변 상황들을 보며 언제부터인가 자식에 대한 큰 기대보다는 무탈하게 잘 지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 대한 욕심이나 로망 같은 것은 갖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상처받지 않고, 자식을 힘들게 하지 않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하는 기준을 미리 그어 놓지 않기로 했다. 그 안에 내가 스스로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 kylejglenn, 출처 Unsplash




나이가 드니 내 주변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는 그녀에게, 생각도 단출하게 정리하면서 살면 좋을 거라 했다. 물건도 버리면 내가 가벼워지듯이, 과한 기대나 로망도 우리를 무겁게 하는 짐이 되는 것이니 눈에 보이는 물건이든 보이지 않는 생각이든 덜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힘주어 움켜쥔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기대라는 명목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결국 후회만 남기는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삼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그녀는 뜨거운 숯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나이 70에도 저렇듯 뜨겁게 항거하는 열정이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여전히 꼿꼿한 청춘이었다. 





© tomcrewceramics, 출처 Unsplash




내가 자식이었을 때 내 부모가 나를 품어 주고 인정해 주었듯이, 이제는 그렇게 배운 것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이다. 늙으면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이 생각하면서 자식보다 더 큰 그릇이 되었으니, 자식의 그릇을 이해하고 품어야 하지 않을까? 견해의 차이를 배신으로 해석하지 말고, 이미 장성한 자식의 판단과 선택을 존중해 줄 때 부모도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그녀의 얼굴은 처음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 둘러친 관념의 거미줄에 갇혀 힘들어했을 것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만나길 바라며 돌아서서 가는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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