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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pr 15. 2024

네 탓이 아니라......





올가을에 할 이사에 대비해서 생각날 때마다 이리저리 눈으로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버려야 할 것과 가지고 갈 것들을 대략 구분하던 중, 30여 년 전에 맞춤 제작한 원목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키 큰 책꽂이 3개, 재봉틀 작업대와 의자이다.

당시에 꽤 많은 금액을 주고 맞췄는데 내가 가구를 만들 줄 알고 나서 다시 보아도 짜 맞춤으로 제법 꼼꼼하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졌다. 나뭇결을 살리느라 연한 스테인만 칠했는데 지금은 세월에 씻겨 색이 많이 바랬다.




© alexandrelion, 출처 Unsplash




색만 날아간 것은 괜찮은데 의자 다리는 희끗희끗한 것이 마치 버짐 같은 것이 퍼져 있어 유독 거슬렸다. 깔끔한 새 집에 함께 데리고 가려니 후줄근할 것 같아 버리고 갈 리스트에 더 가까운데, 가구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유독 나무에 애정이 가는 터라 버리는 것도 마음에 걸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집안 분위기를 망칠 것 같은데 깔끔하고 멋진 걸로 다시 맞출까?'
'저렇게 다시 맞추면 꽤 비쌀 텐데 그냥 가지고 갈까?'


두 선택지를 두고 계속 갈등했다. 페인트칠을 하는 것도 고민해 보았으나, 숨구멍을 다 틀어막는 페인트칠은 나무에 차마 못 할 짓 같아 일단 깨끗이 닦아내고 오일 칠을 해보기로 했다.




© jefferyho, 출처 Unsplash




다른 가구들은 가끔 오일 칠을 하곤 했는데 한동안 재봉틀을 잘 사용하지 않다 보니 의자를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어 관리가 소홀했다. 특히 하루 종일 빛이 드는 창가에 있다 보니 유달리 색이 더 바래고 낡아 보였다.

미안한 마음으로 의자의 먼지를 닦아 내고 기름칠을 했다. 심한 갈증에 목 타는 사람처럼 바르는 기름을 흔적도 없이 빨아먹는다. 몇 번이고 덧 바르자 그제야 반들반들 기름 바른 티가 났다. 허연 버짐 같은 것도 깜쪽같이 사라졌다.




© dantakesphotos, 출처 Unsplash





후줄근하다고 여겼던 누추한 행색은 온데간데없다. 비록 색은 바랬지만 세월이 벗겨내고 덧 입힌 색이라 오히려 운치 있게 느껴진다. 군데군데 찍힌 자국과 색이 바랜 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구도 나와 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다. 가까이 두고 닦다 보니 그제야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희끗희끗 버짐(?)이 피었던 것은 나무 탓이 아니라 내가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서였는데, 그런 나를 알지 못하고 소용이 다 한 네 탓을 하고 있었다. 마음먹은 김에 재봉틀 작업대도 끄집어내어 기름칠을 했다. 갓 들였을 때 그 짱짱하던 푸른빛 대신, 지금은 훤히 제 속 살을 다 내비치고 있지만 그 사이사이 촘촘히 박힌 나뭇결은 더한층 강건해 보인다.

변한 건 네가 아니라 내 생각이었다.
겉모습이 달라졌다고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닌데 그걸 몰랐으니 네 탓이 아니라 모두 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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