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by 파란 해밀



흰머리를 기르기로 하고 염색을 하지 않은 지 4개월에 접어든다. 두어 달 동안은 그저 염색만 미루고 있었을 뿐, 확실히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완전히 마음을 먹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오랫동안 망설였다. 지금도 약간의 미련과 머뭇거림은 완전히 가시지 않고 남아 있다.


오다가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 흰머리를 한 사람들을 보며 그동안 참 쉽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막상 내 경우가 되고 보니 시간만 지난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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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interest



흰색과 검은 머리의 또렷한 경계가 너무 보기 싫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확! 다시 염색해 버릴까?' 하는 갈등을 했다. 흰 머리카락이 다 자라 나올 때까지 과연 잘 참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미장원에 가서 탈색을 했다. 어중간하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을 최대한 잘라내고 숏커트로 했다.


까만 머리카락이 탈색 후에 갈색으로 변했다. 그러고 나니 흑백의 뚜렷한 경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 정도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용사가 일러준 대로 머리를 감을수록 색은 점점 옅어져서 처음의 갈색보다 훨씬 더 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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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interest



하루 이틀이 지나고 머리를 감을 때마다 얼마나 색이 더 바랬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직 완연한 백발은 아니지만 조금씩 더 드러나는 흰 머리카락을 보며 그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을 알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흉내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백발에 있다는 것을...... 그 어느 화려한 염색이나 탈색으로도 내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늙음의 깊이 같은 것이었다.


하나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니 비로소 나를 옭아매고 있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끝이 아닐까? 하고 두려워했던 그 지점이 바로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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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백발이 되었을 때, 달라진 내 모습에 100% 만족할지 지금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이 가벼워지는 것은 분명하다. 젊어 보이려 애썼던 욕망, 늙어 보일까 봐 주저했던 망설임, 흰머리를 감추려고 정기적으로 했던 염색의 구속,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제법 많이 벗어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많으니 그래서 무겁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 했으니 만족이 모자랐다. 이제는 비로소 내 생각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을 가볍게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이만큼 늙어보고서야 겨우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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