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나니 생전 볼 수 없던 지렁이가 보인다. 여전히 징그럽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비만 오면 지천으로 쏘다니더니 그 많던 지렁이들은 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면 어디서 사는지 궁금하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하찮은 미물일 수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전혀 하찮거나 미물이 아닐 수 있다.
20대 초반, 한창 뜨거운 청춘일 때 나는 인생의 덫에 갇혀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이런 질문 앞에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해 일어날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답을 알아야 자리를 털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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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우두커니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작은 일개미 한 마리가 내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어딜 가는지 몹시 분주해 보였다. 멍 때리고 있는 나에 비해 그 개미는 어디를 가야 하는 목적이 뚜렷해 보였다. 괜한 질투였는지 손바닥으로 슬쩍 가는 길을 막아보았다.
그랬더니 개미는 얼른 내 손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틀어 제 갈 길을 가려고 했다. 몇 번을 손으로 막다가 나중에는 좀 더 긴 30센티 자로 앞을 막았다. 손이 짧으니 금방 방향 전환을 하는 것 같아서 긴 자로 막으면 개미가 쉽게 지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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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미는 손으로 막으나 긴 막대로 막으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급히 방향을 틀어 제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려고 했다. 슬그머니 오기가 생겼다. 물을 떠 와서 물 한 방울을 개미에게 떨어뜨려 보았다. 나에게는 물 한 방울이지만 개미에게는 갑자기 온몸을 뒤덮는 날벼락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미는 또 금세 물에서 나와 제 갈 길을 갔다. 물 몇 방울을 더 떨어뜨려 보았지만 개미는 조금도 지치거나 멈추지 않았다. 처음과 똑같이 어쨌든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끝까지 멈추지 않는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어딜 그렇게 꼭 가야 하는지, 왜 가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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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개미가 지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지쳤다. 검지 한마디로 꾹 누르면 소리도 못 내고 죽어버릴 하찮은 개미가 갑자기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겨졌다. 나는 개미처럼 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갈 길을 명확히 찾지도 못했고,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을 하지도 못해서 마냥 주저앉아 있는데, 손톱깎이로 잘라 낸 손톱보다 더 작은 일개미가 저렇게 제 삶에 사력을 다 하고 있는 것을 보며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날의 개미 한 마리가 나를 흔들어 깨웠고, 나는 그 자리를 털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잠식하고 있는 이 생각의 더미가 개미가 온몸으로 뒤집어쓴 물방울 같은 것이겠지만, 개미처럼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다른 각도로 바라보고 판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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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는 알까? 내가 저로 인해 비로소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찮게 여기는 사람의 마음만 있을 뿐......
어쩌면 우리는 몇 번의 장벽에 쉽게 포기했던 건 아닐까?......
개미처럼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했더라면 우리가 원하는 길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그 개미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이렇게 전한다.
너는 태어나서 사람 하나 살리고 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