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면 기다리지 않아......

by 파란 해밀



오랜만에 등산을 하러 나갔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로 한동안 하지 못했는데 날씨도 풀리고, 특별한 일도 없어 모처럼 바깥공기도 쐴 겸 걸으러 나갔다. 추웠던 날씨에 몸도 마음도 잔뜩 웅크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봄은 벌써 동네 어귀쯤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파트 옆으로 길게 들어와 있는 시내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둔턱이 있는데 그 위로 노부부가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서 보니 사이좋게 쑥을 캐고 있었다. 언제부터 했는지 벌써 각자 가지고 있는 봉지에는 반쯤 쑥이 차 있었다. 봄을 품은 연한 쑥색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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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 Pinterest



소곤소곤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얘길 나누며 쑥을 캐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하도 고와서 나도 몰래 빙긋이 웃었다. 얼마 만에 보는 풍경인가? 도시에 살면서 쑥을 캐는 것은 고사하고 쑥 캐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기억이었는데 50여 년 만에 새파란 봄 쑥처럼 되살아났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이다. 봄이면 두 살 터울인 언니와 언니 친구들을 따라 집 앞에 있는 풀 밭에 쑥을 캐러 갔다. 빈 바구니가 어느새 가득 차서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의 칭찬에 대단한 상을 타온 것처럼 으쓱했다. 풀 속에 숨은 쑥을 찾아 캐는 것도 재미있고, 언니들의 소소한 수다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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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온 들판에 쑥이 지천으로 덮여도 언니와 쑥을 캘 수 없다. 몽글몽글한 그 꽃망울 같은 추억도 더 이상 얘기할 수가 없다. 올 1월, 언니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서둘러 먼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봄이면 아지랑이가 춤을 추던 그 길가, 여름이면 풀벌레 울던 여름밤 이야기, 가을이면 가을대로, 겨울이면 또한 추억이 없었을까 마는, 나는 오늘 본 그 노부부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언니가 없는 빈자리가 사무치도록 섧다. 아직도 남아 있는 번호를 누르면 반갑게 받아줄 언니와 아이처럼 쫑알거렸을 텐데......


언니는 유달리 집안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빨래하는 걸 제일 좋아했다. 물이 있는 멋진 풍경을 보면 "와! 멋지다. 나도 저기 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일 텐데, 언니는 언제나 "와! 저기서 빨래나 실컷 해봤으면 좋겠다. 이불 홑청 후드득 뜯어서 씻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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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어 쑥이 다시 자라나도 작년의 그 쑥이 아니듯이, 이미 우리도 작년의 우리가 아니다. 새봄이 되어 맞이하는 따사로운 빛은 좋으나 내게 남은 봄 하나를 내어주어야 한다. 언제 나의 나머지 봄을 다 빼앗길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마냥 남아 있을 줄 알고 있지는 않은지......


내년 봄에도 쑥은 또 나오겠지만 언니는 쑥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

그곳에 가서도 주야장천 빨래만 신나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쩌면 그동안 못 했던 한이라도 풀게 방망이 두들겨 가며 빨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봄은 아직 느린 걸음으로 오는 것 같은데, 두고 온 젖먹이 아이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처럼 내 마음만 괜히 바쁘다. 아무 것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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