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by 파란 해밀



우연한 기회에 꼭 읽어 보고 싶은 영어 원서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들어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영어 공부에 박차도 가할 겸,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부리나케 책을 주문을 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다른 원어민 작가에 비해 한국에 대한 정서나 느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점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했는지가 그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배송이나 도착을 알리는 문자가 오지 않는지 수시로 전화기로 확인을 했다. 오전에 주문을 하면 대부분 그다음 날 도착하는데도 유달리 기다려졌다. 그 책이 오는 대로 열심히 읽으면서 영어 공부를 해야지..... 하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책이 배송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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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하루보다 더 길게 느껴진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책이 도착했다. 겉포장을 호기롭게 뜯었다. 당장에라도 눈에서는 불이 나올 것 같은 과한 열정을 뿜으며 책을 꺼냈다. 이솝 우화의 우유 팔러 가는 아가씨처럼 나는 벌써 그 책을 다 읽고, 그 책의 유려한 표현만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우유 팔러 가던 아가씨도 필시 나의 이런 마음 같았을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한마음, 한뜻의 동지가 되었다. 최소한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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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을 젖혀두고 당장 책을 읽으려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가만히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한글로 된 책도 나이가 들면서는 거의 읽지 못하고 있는데 무슨 배짱으로 영어 원서를 샀는지, 내 눈의 상태를 잠시 깜빡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샀던 영어 원서의 활자는 기본 사이즈보다 커서 읽기에 수월했다. 7년 전, 칠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환승 차 들렀던 LA 공항 서점에서 샀던 영어책의 활자가 너무 커서 비웃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어느새 그 사이즈가 내게 최적화된 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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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산 책들은 대부분 활자가 커서 읽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책도 당연히 그 정도일 줄 알고 앞뒤 가리지 않고 샀는데, 두세 줄만 읽어도 온 눈에 힘을 주어야 겨우 읽을 수 있다. 일반 책 보다 활자가 더 작아서 나한테는 그저 그림의 떡이다. 오다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띄면 혹시나 정심을 하고 다시 펼쳐 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지만 도수를 조정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안경점에 갔다. 상황 설명을 하고 심봉사 눈 뜨듯 단번에 번쩍하고, 슈퍼의 작은 병에 적힌 깨알 같은 상품 설명도 다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단호하고 무지한 나의 요구에 안경사는 빙긋 웃으며 지금 여기서 도수를 더 높인다고 해서 작은 글씨가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받아들여야 할 내 눈의 한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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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독서 확대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했다. 책과 나 사이에 두툼한 확대경을 두고 얼마나 익숙해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을 수 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두 눈을 뻔히 뜨고 있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참했다. 두 다리가 있으면서도 예전처럼 걷기가 힘들어진 친정 엄마가 그토록 완강하게 지팡이를 거부해 놓고, 머지않아 결국 그 지팡이를 짚으며 느끼셨을 심정이 비로소 읽어진다.


늙는다는 것은 이처럼 적응이라는 탈을 쓴 채 찍소리 못하고 하나, 둘 현실에 굴복하는 것인지...... 헛헛해진 마음에 괜히 찍찍거려 본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악다구니다. 머잖아 친정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확대경과 많이 친해져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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