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

by 파란 해밀



몇 년 전에 어금니를 때운 금붙이가 딸깍 떨어졌다. 물을 마시는데 난데없이 입안에서 걸리적거리는 게 있어 뱉어보니 금니 조각이다. 가기 싫은 치과를 기어이 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다행히 이곳에도 괜찮은 치과가 있다. 몇 달 전에 임플란트 나사가 헐거워져서 갔는데 병원 시설도 쾌적하고 의사나 간호사들 모두 친절해서 앞으로 계속 적을 두고 다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에 사는 동안 30년 넘게 다닌 치과가 있다. 30여 년 내 치과 이력이 그곳에 다 있다. 처음 다닐 때는 젊은 의사 혼자였는데 지금은 4명의 의사와 많은 직원들을 두고 꽤 규모가 있는 곳으로, 집에서 가까워 다니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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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나 임플란트 치료를 하자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정기적으로 방문을 해야 하는데 위치도 가깝고 익숙해서 편하게 다녔다. 가끔 비용이 꽤 드는 시술을 할 때는 "우리 병원에 다니신 지 오래되었으니까 조금 할인해 드릴게요" 하는 원장 선생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익숙한 안정감만으로도 덤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랬는데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탈이 나면 당황스럽다. 부산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간다고 해서 당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곳에 가까이 있는 동네 치과를 가기로 했다. 스케일링을 포함하면 벌써 세 번째인데 치과는 언제나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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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가기 싫은 곳이지만 억지로 치과를 갔다. 간호사가 한 움큼 찔러 준 솜뭉치를 물고 치과 진료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기다리는 동안 통창 너머 보이는 전경이 평화롭다. 부산 치과에서는 이런 풍경은 꿈도 못 꾼다. 그저 꽉 막힌 벽면에 대문짝만 하게 걸린 모니터가 보여주는 흉한 엑스레이 화면만 바라보아야 한다. 거기에 비하면 얼마나 호사인지 모른다.


규모도 부산 치과에 비교해 손색이 없고, 툭 트인 전망을 서비스로 받았는데 난데없이 먼저 다니던 치과가 생각났다. 정을 통한 것도 아니고, 그 병원에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멋들어진 풍경을 보면서도 난데없이 떠오르는 옛님처럼 새록새록 돋아난 기억이 갈비뼈 언저리를 긁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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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세세하게 설명을 하는 친절한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와 30년을 같이 늙어온 부산의 그 의사 생각이 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넓은 병원 내부를 보면서 내 집처럼 훤히 다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부산의 그 치과가 구석구석 생각났다.


마치 남편 몰래 외간 남자를 만나러 나온 바람난 여자처럼. 젖먹이 아기를 혼자 집에 두고 나온 어미처럼 마음이 분분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내게 잘 포장된 선물처럼 건네는 달콤한 인사말에도 나는 여전히 속에서 울렁거리던 옛 기억을 끝내 털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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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도 병이라더니...... 세월이 켜켜이 쌓이는 동안 마음 한 귀퉁이 뚝 떼어 같이 묵혀두었나 보다. 이만큼 나이가 들어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이 없어 홀가분하다며 좋아라 했는데 말짱 헛말이었던가 보다.


젊어서는 그저 편리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능사라고 여겼는데, 이만큼 늙고 보니 세월에 곰삭은 장아찌 같은 것에 자꾸 마음이 간다. 시간의 덧없음을 알아서일까? 그럼에도 그 시간의 무게를 잘 알아서일까? 길게 쳐진 그림자를 등짝 어디쯤 붙인 채로 병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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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애써 마음을 돌려먹었다.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던가? 흘러가지 않는 것이 어디 있던가? 30 년도 손가락 세 개 꼽고 나니 폭우가 쓸고 간 것처럼 떠내려가고, 단단한 시멘트로도 금붙이 하나 제대로 붙들고 있지 못하는데, 보이지도 않는 사람 마음에 나는 그동안 무엇을 주렁주렁 달아매고 있었나?


인생은 잠시 놀다 가는 것이라는데, 내 것도 아닌 놀이터에 무슨 미련이 많아 돌에 새긴 연인들의 이름 같은 것을 새기려 했을까? 돌도 세월에 깎이고, 그 연인들도 숱하게 변했을 텐데 말이다.


어금니를 때우면서 구멍 난 내 마음 한구석도 슬그머니 때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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