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모른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비에 젖은 풍경이 계속 나를 자리에 눌러 앉힌다. 시계가 오후 12시를 넘기면서 내 맘 같지 않은 또 다른 마음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냥 쉬어'
'연휴 동안 못 갈 텐데 오늘은 갔다 와야지'
'하루쯤 더 쉬어도 돼? 지금 분위기 좋잖아'
'그러면 너무 오랫동안 못 가는데?'
조금 더 버티다가 속 시끄러운 갈등을 걷어차고 가방을 꾸려 평소 즐겨 쓰던 예쁜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한가로운 도로를 운전해 가면서 역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수영장에 도착했다.
수영장 입구에는 우중에도 사람들이 많이 왔는지 우산꽂이 통에 제법 많은 우산들이 꽂혀 있었다. 쓰고 온 우산을 접어 버튼으로 고정시켜 우산꽂이에 넣었다. 볼 때마다 기분 좋게 하는 덤덤한 친구 같은 우산이다. 10년 넘게 쓴 오래된 우산이다. 그래서 버튼에 약간 녹이 슬어서 열 때마다 조금 애를 먹긴 하지만 여전히 튼튼하고 예뻐서 비가 올 때마다 즐겨 쓰는 우산이다.
통에 꽂힌 검고 칙칙한 다른 우산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화사한 우산을 보며 그동안 잘하지 않았던 예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던 것은 어쩌면 이별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구석에 찔러 넣고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다시 한번 눈도장을 찍었던 것은 미리 작별 인사라도 하려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수영을 마치고 나와 우산을 챙기려는데 낯익은 우산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돌아간 후라서 통에는 우산이 몇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내 우산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혹시 뒤로 빠져 바닥에 떨어졌나 찾아봐도 없다. 그런데도 내 우산이 없다는 것이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눈이 잘못되어서 색깔 구분을 잘 못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닌 줄 알면서도 직원에게 혹시 우산을 두는 다른 곳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없다는 답을 듣고도 한동안 멍했다. 그 직원도 함께 찾아보아 주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색상이나 패턴이 다른 우산들과 달라서 착각해서 잘못 가져갈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이니 의도적으로 가져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여기 오실 때는 예쁜 것 가지고 오시면 안 돼요. 안 그러면 옷장 안에 넣어 두시든지 해야 돼요"
10년이 넘도록 비가 올 때마다 쓰고, 수영장 갈 때마다 입구에 꽂아 놓고 다녀도 여태 아무 일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숱하게 오가는 곳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남의 우산을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가져갔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제 우산을 가져가듯 편하게 들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 내 우산을 들고는 황급히 달려갔을까? 비를 피해 당당히 내 우산을 펼쳐 들고 갔을까? 한 손에는 자신의 우산을 펼치고 다른 한 손에는 내 우산을 그냥 들고 갔을까? 비가 오면 앞으로도 그 사람은 내 우산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쓸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생각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수긍할 수 있는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다.
"아유! 어떡해요? 많이 아끼시는 우산 같은데?"
"할 수 없죠....."
아쉬운 마음을 품고 수영장을 나오는데 올 때와 달리 비가 멎어 있었다. 잃어버린 우산의 값이었을까? 다행히 우산이 없어도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라디오를 틀고 차 창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는 옥색 주단이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 순간, 그 사람도 많은 갈등을 했을 것이다. 남의 물건을 탐하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내 우산의 유혹이 더 강했던 것 같다. 내게 단순히 우산 하나를 잃어버린 것보다 10년 넘은 오랜 친구를 떠나보낸 것 같은 상실감이 더 큰 것처럼......
돌아오지 않을 친구를 보내며 나의 짧은 송사가 그 사람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마음 불편해하지 말고 내가 늘 행복하게 활짝 펼쳐 들었던 것처럼 언제나 내 우산을 그렇게 펼쳐주세요.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의 친구를 뺏어가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