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아침을 먹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아는 번호가 아니면 절대 전화를 받지 않는데 그날은 아침 출근 시간대라 혹시 주차 때문인가 해서 모처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ooo 씨인가요?"
"네, 그런데요"
"여기는 서울 중앙지검 ooo 검사인데, 지금 통화 시간 괜찮으신가요?"
마침 틀어 놓은 TV에서 불과 몇 분 전까지 서울 중앙지검과 관련된 뉴스를 듣고 있던 터라, 현실과 전화 내용을 분리하지 못하고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었나?'
검찰이라는 소리에 이건 분명히 보이스 피싱이라는 확신이 들면서도 1~2초 동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순식간에 나의 과거를 훑어보았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더욱이 "지금 통화 시간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 과한 친절이 결정적으로 더 이상 통화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마치 "고객님" 소리만 빠진 고객 센터 직원의 친절한 어순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경험한 등기소만 가도 여전히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말투에 만정이 떨어졌는데, 검사가 나의 통화 시간 가능 여부까지 물으며 용건을 말할까 싶었다.
"아니요. 지금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고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OOO에 '서울 중앙지검 보이스피싱'으로 입력을 해두었다.
막 차려 놓은 아침을 먹으려고 다시 식탁에 앉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드디어 나도 오랜만에 보이스 피싱에 간택(?)을 당했구나, 그들 손에 나의 개인 정보가 들어갔다는 것이 영 찝찝하면서 문득 20년 전, 회사로 걸려왔던 보이스 피싱이 떠올랐다.
국민은행이라며 첫마디만 들어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연변 아낙네였다. 그녀와 짧게 통화를 이어갔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보이스 피싱임을 더욱 확신시켜 주는 어눌한 한국 말투였다. 더 이상 길게 통화를 할 수 없어 "국민은행 어느 지점인가요? 제가 다시 전화를 드릴게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매우 불친절(?) 하게 아무 말도 없어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그때에 비해 20년이 지나 새삼 전화를 받아 보니 보이스 피싱도 참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에 걸맞은 목소리를 어디서 그렇게 찰떡같이 구해서 기똥차게 활용을 하는지, 그들도 나름 인력을 관리 배치하는 전담 부서가 있는지 궁금했다. 보이스 피싱만 아니면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듣고 싶은 남저음이 참으로 매력적인 스윗한 목소리였다.
몇 년 전에 보이스 피싱과 관련된 영화를 보고 '저들도 참으로 부단하게 노력하는구나.....' '날로 각성하는 우리와 맞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쥐어짜는 저들도 그저 가만히 편하게 앉아서 전화기만 돌리는 게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관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한때, "혁신"이라는 캐치 플레이즈 아래 회사 내에서 새로운 업무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아이디어 개수와 참신한 내용으로 직원을 평가하던 때라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그동안 없던 것을 새롭고, 효과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날로 달로 발전(?) 하는 보이스 피싱의 현란한 수법에 가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머리로는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그것과 상관없이 가슴은 서둘러 두세 번 방망이질 쳤던 것을 보면 어쩌면 나도 당할 수 있겠다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두뇌를 좋은 곳에다 쓰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물을 얻을까? 하며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20년 만에 받은 보이스 피싱 전화 한 통이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남을 등쳐 먹는 저들도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해(?) 변하고 있는데, 지난 20년 동안 나는 과연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다 살다 보이스 피싱을 통해 나를 반추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이스 피싱 두 통화 사이에 나의 20년 세월이 그물처럼 걸려 있다. 그 그물을 조금씩 거두며 거슬러보니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았던 40을 갓 넘긴 나를 만난다. 그때 꿈꾸었던 것을 느리지만 하나, 둘 이루며 이 자리에 있다. 혹시 또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세 번째 보이스 피싱은 나를 어디에 데려다 놓을 지 물음표와 빈 칸으로 남겨 둔다.
※ 우리 모두 뛰는 놈 위에 훨훨 날아다녀서 보이스 피싱에 절대로 걸려들지 않아 자진폐업(?)하고 그 씨가 말라서 뉴스에서 더 이상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