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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Mar 09. 2021

어느새 함께 간다



2021. 03. 09.


"어머니, 저 상의 드릴 게 있는데요?"

자식이 심각한 얼굴로 상의 드릴 게 있다고 하면 부모는 괜스레 걱정부터 앞선다. 속으로는 잔뜩 긴장되었지만 겉으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무슨 상의?"

집 근처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커피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생각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여자 친구에 관해서요"
"여자 친구가 왜? 잘 만나고 있잖아?"
"좀 고민이 있어서요"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다. 마침 집에 둘 뿐이라 커피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여자 친구랑 싸웠어?"
"아뇨. 계속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요"




© qimono, 출처 Pixabay




아들은 그동안 비혼을 이야기해왔다. 본인의 뜻이 그러니 나도 아들 생각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던 녀석이 여전히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지금 만나는 여자 친구와 하겠다며 결혼에 대한 희미한 가능성을 비춘 적은 있었지만 그다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너는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걔는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시간과 기회를 빼앗는 건데 계속 만나는 건 네가 너무 이기적인 것 아냐?"
"그래서 분명히 제 생각을 얘기했어요.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자기도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결혼과 상관없이 나를 계속 만나겠다고 했어요"
"사람 생각이 변할 수도 있는데 조심스럽긴 하다"


그 얘기가 있은 후로 별말이 없길래 공통된 생각으로 잘 만나고 있는 줄 알았다. 아들은 여자 친구와 만난 지 2년이 되었지만 장거리 연애를 하다 보니 실제로 만난 횟수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여자 친구는 심성이 착해서 모든 걸 자신에게 맞추어주고, 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어 편하긴 한데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좀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하려면 불편해하는 것 같고, 말수도 적어 단순히 일상적인 이야기로만 그치게 되고, 말이 없는 어색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자꾸 혼자 급하게 떠벌거리게 되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조금 지친다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일장일단이 있고, 다른 누구를 또 만나도 서로가 적응하기 위해 그동안 쏟아부은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데, 착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니 계속 만나려고 마음을 먹어도 불쑥 고개를 쳐드는 한계에 자꾸 흔들린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태로 내가 이 사람과 평생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앞에 자신이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 그날의 요지였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평소 두 녀석들에게 결혼할 배우자로 무엇보다 소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무게를 두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유연한 사고로 상대방과 다른 차이를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파트너라고 생각해왔다. 부부에게 크고 작은 불만이나 오해는 살다 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오해나 불만을 원만히 해결하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대화이다.

말을 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말이 말이 아닐 때도 있다. 철벽을 두르고 본인 생각과 판단만 고수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벽을 치고 나오는 공과 같다. 그런 사람과 수 십 년을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너에게 일방적으로 맞춰주는 것이 지금 너는 편할지 모르지만 그게 과연 오랫동안 건강하게 이어질지 엄마는  의문이야. 그것이 그 사람을 선택하는 중요 포인트가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해. 인간관계가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 더구나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부부관계에서는 더 더욱 그래. 발란스가 기울어진 관계는 언젠가 불만이 터져나오게 되어 있어. 그리고 너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보는 건 어때?"
"근데 변할 것 같지 않아요. 전에 전화로 얘기를 해봤는데 한동안 변하려고 노력하는 게 조금 보였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어요"
"그게 그 사람의 천성이라면 바꾸기가 쉽지 않겠지. 너도 엄마가 얘기하는 면에 대해서 잘 안 바뀌잖아. 한 번 말한다고 쉽게 바뀌길 바라는 건 무리야"
".........."
"그래도 그 사람의 많은 면이 좋은데 네가 불편해하는 그 면이 더 이상 관계를 지탱하는데 많은 장애가 된다면 만나서 진심을 다해 얘기해봐야 할 것 같은데?"
".........."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봐야 미련이 없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거거든. 헤어지는 결정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잖아. 한 번 더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 봐"
"네. 그래 보겠습니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어느 날 아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본래의 성격이 그렇다며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들이 불편해하니 노력은 해보겠다는 것이다. 서로 개선될 여지가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노력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했다. 이별을 고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아들이 돌아왔다.


"마음 상하지 않게 잘 얘기하지 그랬어?"
"네. 그렇게 했어요. 본인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상대방은 별말 없었어?"
"걔도 그동안 저한테 불만이 있었더라고요"
"왜 안 그렇겠어? 무슨 불만이 있었데?"
"제가 좀 많이 무심했대요"
"엄마가 너한테 느끼는 거랑 같네. 그러면 너도 좀 바꾸어야 해"
"네. 제가 그런 면이 좀 많나 봐요. 제 친구들도 그러던데"
"너도 그런 면을 고치지 않으면 다른 누구를 만나더라도 마찬가지야. 엄마는 엄마니까 접고 들어가도 어떨 땐 서운한데 다른 사람들은 더 하겠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도 진지하게 고치려고 노력해 봐"
"네. 알겠습니다"



© realworkhard, 출처 Pixabay




그동안 만난 시간 안에 쌓인 정이 있을 텐데 모든 감정을 쉽게 도려낼 수 있을까마는 그날 이후에도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이어갔다.


"아들, 괜찮아? 마음이 허전하지?"
"좀 그렇긴 하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먼저 그렇게 하기로 한 건데요"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왜 안 그렇겠어? 그래도 내가 도무지 소화할 수 없는 면이 장애인데, 그게 잘 바뀌지 않으면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엄마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많이 힘들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강보에 쌓여 내 팔뚝만 하던 녀석이 어느새 성인이 되어 이제 제 인생의 고민을 얘기한다. 하루하루 지나는 걸 보면 그날이 그날 같지만 그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고심을 할 때마다 이따금 나를 불러 제 속 얘기를 털어놓아주니 한편으로는 그저 고맙다.

엄마이기도 하지만 저보다 먼저 삶을 살아보았으니 앞서 걸어본 사람으로서 대수롭지 않은 생각이나마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이는 녀석이 제 길을 잘 찾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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