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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morebi Nov 25. 2021

몸속에 화가 많아

I dont know


 어떤 때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떤 때에 할 말은 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아야 하는 순간이 있는 반면에 참으면 나만 호구가 됨으로 표현에 두려움이 없어야 할 때도 있다. 어느 쪽이 됐던지 그런 지경까지 이르면 몸속에 화가 쌓이는 건 똑같다. 화가 쌓이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질 수 있고 하지 말아도 될 말이 넘치기도 하고 해야 할 말이 막히기도 한다. 지금이 딱 그렇다. 아마 첫 문장부터 나의 수가 다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글을 쓰다가 너무 감정에 치우친 건 아닌가 싶어서 잠시 덮어놨다가 다음 날이 되어 다시 쓰고 있다. 어제 하고 싶었던 말이 어느덧 어디에 묻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타임캡슐처럼 찾을 수가 없기도 하고 과연 이 글을 적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되는 문장도 있지만 모든 걸 미래에서 이 글을 보고 나의 이성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어서 남겨두려 한다. 확실히 어제보다 이 글의 몰입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좀 더 냉철하게 어제 내가 왜 판단이 안 섰는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다면 과연 나는 행복할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살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만 사라지는 세상이라면 그것도 과연 행복할까. 내가 외로울 때 내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만큼 누군가의 기억의 일부 중에도 내가 들어가 있긴 할까. 세상에 나 말고 아무도 없다면 그립지도 않은 사람들마저도 기억하다가 끝날것 같다. 여기서 끝이라는 건 모든 걸 말한다. 끝에 다다르기 전엔 결국 나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끝을 보지 않을까 싶다. 몸속에 화가 많을 때의 끝은 새벽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잠드는 것 같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라고 꼭 좋은 친구는 아닌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제일 판단이 안 서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나에겐 무조건 해당되는 말 같다. 내 생각이 맞다면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로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지낸 것 같긴 한데 그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엔 항상 우울함과 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 친구와 계속 추억을 쌓고 있나 생각을 해볼까도 싶지만 다시 만날 때만큼은 우울함이 사라진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 친구를 좋아하는 게 아닌 나의 추억을 좋아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학창 시절에 알던 서로의 성격이 조금씩 바뀐 게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은 나만 느끼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처음엔 몸속에 화가 많아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고 느꼈지만 그런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몸속에 있는 화의 메시지 같았다.


 이 글을 쓰면서 사실 뭐라고 내가 써 내려갔는지 잘은 모르겠다. 몸속에 화가 많을 때 쓰는 이 글이야말로 나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런 나 자신이 미래에서도 이 글을 보고 다시 화가 날지 잠시 덮어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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