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조각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수현 Jul 16. 2024

봄으로의 이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로운 몸으로 도망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지만, 짐을 늘릴 생각은 없었다. 항상 계절 옷과 간단한 생필품, 소꿉장난 같은 주방기기들만 가지고 다녔다. 자연스레 책이 많아지고 취향이 생기면서 마음에 드는 집기들이 생겨도, 조명등이나 일인용 소파 정도였지 혼자서 옮기지 못하는 사이즈의 가구는 들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그런 결심을 깨게 된 것은 춘천에 오고서도 2년이 넘어서는 시점이었다. 매달 내는 월세가 슬슬 비싸게 느껴졌다. 슬슬 풀옵션 원룸에서 사는 일이 피로했다. 밥을 먹는 곳에서 잠을 자고, 화장실 습기가 방안에 머물고, 책상과 화장대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생활. 막상 손을 걷어붙이고 찾아보니 모아둔 돈에 대출을 보태 전세를 구하면 방 두 개에 베란다, 거실까지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은행에 내는 대출이자는 월세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원룸에서 방 두 개짜리 빌라로 넘어오는데 한 달에 나가는 돈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이었다. 원래 살던 수도권에서는, 그리고 서울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가벼운 몸으로 언제든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던 자유의 문은 슬금슬금 닫혔다. 하지만 세탁기, 냉장고, 침대, 책상, 의자, 식탁, 가스레인지… 휑한 방과 거실을 채우며 복잡한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이 도시에 자리 잡았다는, 주말에도 집이 답답해 카페나 어딘가로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안도감을 나도 모르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나 보다.


  처음 이 방에서 마주한 봄을 떠올린다. 창밖에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데, 언제나 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나의 가족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가족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천둑에는 여린 잎들이 자라나 푸릇푸릇하다. 최근엔 회사 동료가 건조기를 바꾸며, 이전에 쓰던 것을 나에게 줬다. 덜그럭덜그럭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가벼운 몸으로 훌쩍 떠날 수는 없지만 이런 환경들 덕분에 조금 더 산뜻한 영혼을 갖게 됐다.


  이제 다시 창문을 열어 봄을 맞아야겠다. 더 따뜻한 볕을 찾아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고양이들을 지켜봐야지. 해 질 녘 창밖 빛나는 윤슬을 오래오래 시선에 담아둬야지.



* 탐방의 로컬 에디터 3기로 참여(2024.2.~4.)하며 쓴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