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한가운데에서

돌봄의 시작, 변해버린 일상 시간

by 순담

9년 전, 아빠가 일산화탄소중독으로 쓰러지신 후

우리 가족의 ‘돌봄’은 시작되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폭풍 같던 시간은 잔잔해져 갔다.


그런데 2년 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할머니의 급성뇌경색

잔잔하게 흘러가던 우리의 시간은 어느새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일상에서 흔히 듣던 말인데, 그날의 그 한마디는

태어나 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낯설고,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방안을 누비며 잔소리치 던 나의 할매가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이 조용히 눈만 감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던 현실이 내 눈앞으로 다가온 그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모든 중력이 나를 짓누르듯 가슴이 답답했고, 숨이 막혔고,

몸은 늪에 빠진 듯 움직일때 마다 지하세계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내가 아는 모든 종교와 조상님께

"우리 할매를 살려달라"고 빌기도 하고,

"차라리 아프지 않게 좋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빌기도 했다.

모든 게 멈춰버린 듯한 나의 일상과는 달리, 시간은 야속할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결국 걸려온 중환자실의 전화...

울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할머니를 보자마자

시간이 거꾸로 흘러 7살 꼬마처럼 마냥 눈물이 터졌다.

제발 일어나라며 떼를 쓰듯 움직이지 않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1인실로 이동을 했다.


가족들은 번갈아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낮에는 먼 친척들이 어렵게 발걸음을 해 위로와 눈물을 나눴고,

밤에는 요란한 코골이 대신 '삐-삐-삐-'하는 기계소리만 병실을 채웠다.

혹여나 할머니가 움직이는 순간을 놓칠세라 화장실도 참으며 곁을 지켰고,

새벽에 잠들 때면 할머니의 마지막이 될까 봐 수시로 잠에서 깨며 할머니의 곁에 있었다.


가족들만 알아볼 수 있는 미세한 움직임은 희망의 불씨를 만들었다가도

"의식이 아닌 반사신경일뿐"이라는 말에 금세 다 타버린 재로 변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요양병원을 권하는 의사의 말에

가족들은 집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게 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오겠다는 엄마의 단단한 의지는

여러 번의 반대와 의료진의 현실적인 판단 앞에서

마치 비에 젖은 종이처럼 서서히 힘을 잃고, 시들어버렸다.

결국 요양병원을 선택했다.




요양병원과 조율해 한동안은 매일 회사 가듯 병원으로 출근했다.

하지만 요양병원 측의 요청으로 얼마가지 못해 일주일에 두 번만 할머니를 보러 갈 수 있었다.


콧줄, 소변줄, 산소 체크

잠시라도 우리 손길을 느끼게 하기 위해 할매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서 아주 작은 반응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일 만큼의 움직임, 힘겹게 떠지는 눈

가족들의 간절함과 할머니의 의지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모실 수 있도록

집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복지 정보를 알아보고,

사촌들과 병원과 쉼 없이 협상하고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수많은 생채기를 얻었지만

결국, 할머니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길을 다시 열어냈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잔잔하게 흘러가던 일상을 과감히 버리고,

조금 더 치열하고, 혼란스러운 일상 속으로 우리를 내 던졌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머니의 곁에서

날짜 개념도 흐려질 만큼 바짝 붙어 지냈다.

나의 시간은 있어도 없는 것 같았고,

마음은 늘 할머니의 상태에 기대어 흔들렸다.


예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건과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감정들 사이를 지나며,

치열했기에 많이 울고,

혼란스러웠기에 많이 싸우고,

울고 싸운 만큼 많이 웃었다.


'가족 돌봄'은 정답이 없어서 어렵고,

오답노트를 아무리 만들어도 소용이 없지만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 돌봄은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