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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 사건

1975년 4월 9일, 대한민국

by 훙훙

오늘은 대한민국 사법 암흑의 날인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 사건, 일명 2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4월 3일에 포스팅했던 민청학련 조작 사건과 연결되는 사건이라 같이 보시기 편하도록 그동안 다른 사건을 포스팅하지 않았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은 https://brunch.co.kr/@soongeunlee/10

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인민혁명당이라는 단체는 1964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지하조직으로,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던 활동가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낸 실체 없는 단체였습니다.


모든 진술과 증거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되었고, 심지어는 피고인의 진술마저 창작해 낸 수준이었습니다. 때문에 기소를 맡은 검사들마저 도저희 혐의점을 찾을 수 없고, 기소유지가 불가능한 사건이라며 사표를 내버릴 정도였죠.


그렇지만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이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법원에서 비교적 가벼운 1~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974년, 4월 3일 유신정부에 의해 민청학련조작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언론과 민심은 이미 유신정부에게 이반해 있었고, 그동안 자행된 수많은 용공조작 사건 탓에 민청학련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민청학련을 뒤에서 조종하는 지하단체가 있다고 발표했는데, 그럼 그 지하단체는 어떤 조직인지 밝히라는 요구가 이어지게 됩니다. 위기에 빠진 유신정부는 간첩조직을 급하게 조작해야 했고, 그때 떠오른 것이 인민혁명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은 이미 10년 전에 재판이 끝났고, 비교적 가벼운 처벌로 결론이 내려진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도 실체가 없었던 조직이 10년이 지난 1974년에 갑자기 재조직될 리도 없었죠.

정부는 자신들의 정권 연장을 위해 아예 없는 일을 만들어 내기로 합니다. 10년 전 인혁당 사건으로 처벌받았던 이들이 인혁당을 재건하고, 이를 위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선동을 조장했다고 조작한 것입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정권유지에 혈안이 된 박정희와 유신정부의 구성원들은 1974년 5월 27일, 이들을 체포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내란음모의 혐의로 재판에 넘기게 됩니다. 이들은 유신 헌법에 따라, 일반 재판이 아닌 비상군법회의의 재판을 받았고, 36명이 기소되고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고문사실을 알고 이를 언론에 폭로하였으나, 유신정부는 이들을 국외로 강제 추방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사비를 들여 광고를 내기도 했고, 재판장에서는 대한민국 사법부를 히틀러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법정에는 오물이 쌓여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요.(반박 불가...)


피해자들은 재판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셨으나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이들의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량이 확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해하지 못할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상고 기각 판결이 난지 20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사형이 선고된 8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피해자 가족들은 선고 기각 다음날 면호를 와서, 이미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신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문 흔적(손톱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고 합니다.)과 사건이 길어질수록 악화되는 여론을 덮기 위한 정권의 자충수였습니다. 심지어 장례를 치르는 도중 운구차를 가로막고, 시신을 유가족으로부터 강탈해, 자기들 마음대로 화장을 해버리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부검을 실시해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785.jpg 유래 없는 신속한 사법집행은 정권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결국 인민혁명당 재건 조작 사건은, 2002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정권에 의한 조작된 용공사건으로 결론이 내려졌고, 유가족들은 재심을 청구해, 3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75년 당시에도 국제 앰네스티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법학자협회는 국제사법 암흑의 날로 규정하는 등, 수사, 고문, 재판 과정, 사후 처리 모든 면에서 조작이 이루어진 사건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사회 일각에서 인혁당사건의 피해자들을 간첩 취급하고 유가족을 모욕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인혁당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당해 600억 원을 배상하게 되었지만, 이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진행하면서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또 모 정치인은 인혁당 사건에는 두개의 판결이 있다며 인혁당 사건을 왜곡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진영논리가 만연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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