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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un 19. 2023

나를 지키는 일.

시작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기.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 그래서 어떤 기억이나 상처는 아무리 촘촘하게 즐겁고 행복한 일상을 꾸려 나간다 해도 퇴색되지 않고 선명하게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런 기억이나 상처는 '그런 일이 있었지 혹은 그랬었지'처럼 종결된 경험이 아니라 나를 설명해야 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정체성'으로 그림자처럼 내 뒤를 쫓는다.


'정체성'이 된 기억이나 상처는 시간을 뛰어넘는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고, 어떤 날엔 몰라도 좋았을 다른 장면까지 더해 불행의 서사를 더 깊고 넓게 확장시킨다. 종종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서 덧난 마음에 슬쩍 온기가 도는 날도 있지만, 아쉽게도 그건 매우 드문 일이다. 때문에 흔히 '마음속 어린아이'라 불리는 내 안에 상처받은 아이는,  시간이 흘러도 자라기는커녕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리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한다. 좀 나아진 것 같아서, 지금쯤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어설픈 희망에 기대 섣부르게 기지개를 켜다 뒤돌아 머리를 처박고 울어야 했던 날들이 있어서다.


그때는 몰랐다. 세상엔 바로잡을 수 없는 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어떤 사랑은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떠나보내야 완성될 수  있고, 삶의 어느 장면에선 시작이나 기회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래서 어떤 시간은, 더하거나 덜어냄 없이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도. 그것이 오히려 내가 가진 불행의 무게를 줄여 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난, 오래된 불행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나를 지킨다. 종종 새롭게 등장하는 현재의 불행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바라본다. 따뜻하고 선량하고 다정하고 편안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결코 아름답지 않은 삶의 장면들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눈을 가릴 수 없어 봐야 했고, 귀를 막을 수 없어 들어야 했고, 도망갈 수 없어 삶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렇게 나와 함께 자라면서 내 것이 되고,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울퉁불퉁한 날것의 시간 그대로. 그러다 보니 알았다. 오래된 기억이나 상처가 곪아 자리를 넓히는 건, 어떻게든 아름다운 삶이고 싶은 어리석은 내 욕심 탓일 수도 있다는 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 영우는 친구 수영에게 말했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라고.


한때는 나도 저런 문장을 갖고 싶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같은 회색빛의 문장이 아니라, 따뜻하고 다정한 문장으로 내 삶을 설명할 수 있길 바랐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보일 수 있고, 보이고 싶은 삶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봄날의 햇살이 비추기엔, 내 삶에 드리운 어둠이 너무 짙었다. 휘장처럼 거느린 어둠 앞에서 햇살은 언제나 금방 빛을 잃고 사라졌다. 그게 싫어서 감사일기도 써보고, 일부러 웃어도 보고, 자기 계발서에 등장하는 긍정의 메시지에 좍좍 밑줄을 그어가며 나를 변화시키려 바득바득 애써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야 했던 불행의 그림자를 지워주지는 못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쫓으면 쫓을수록 멀리 달아났다.


그래서 더는 기대하지 않는다. 바라지 않는다.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 그저 살아감을 택하고 나아간다. 그럼에도 마음에 소란이 이는 날이면 조용히 하루가 끝나길 기다린다. 내일은 모른다. 또 무얼 마주하고 무얼 보게 될지. 다만, 오늘의 내가 괜찮으면 된다. 무너지지 않으면 된다. 그럼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 봄날의 햇살 같은 삶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나를 지킬 수 있으면 괜찮다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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