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이었다.
역마살로 인해 길을 떠나고 떠난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방패막이었다.
한동안 떠나지 못했던 것은
적응했거나, 역마살이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잠시지만, 내가 머무는 곳에 보람이 있었다.
보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적금통장에 쌓여가는 숫자였다.
쌓여가는 숫자를 보면서 괜찮다. 괜찮다.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거창 할 것 없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쉬웠다. 계약이 만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떠날 수 있었다.
만족할 만한 숫자는 아니지만 떠날 수 있는 숫자였다.
떠나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떠나고 보니, 떠나 온 곳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떠나고 보니, 알았다.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적응자였다.
혼자 운동하고, 혼자 쇼핑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부산영화제를 다니면서 항상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온종일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커피 그리고 바다 이 모든 것을 혼자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롯이 혼자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이 슬프다.
인정하기 싫었다.
역마살로 떠돌아다니는 걸로 하고 싶었다.
머무는 곳이 집이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식구이며,
완전히 혼자이고 싶었다.
또 역마살을 핑계 삼아 나가려고 한다.
제 생각에 기존의 보수 신학―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신학―은 사회 일반에 어떠한 지적 감흥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은 본인들만의 왜곡된 언어와 기능적 고착 상태에 빠진 구원론을 버리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엄밀성을 갖춘 신학―소통할 수 있는 신학―을 연구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