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입학 전부터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던 아이
여러 영화가 있을 수 있지만 기억 속 첫 영화관 영화는 ET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는 스크린 속으로 이미 빨려 들어가 있었다
밖에서 노는 것을 싫어하는 집순이는 영화관이 놀이터였다
초등학교 에헤 국민학교 입학과 동시에
비디오플레이어를 사오신 아빠 내 기억에 대우꺼였다
너 몇살이니
영화관을 하시는 아빠 친구
이건 운명이었었다
데스트니 거를 수 없는 운명
중학교 시절
시험기간이 끝나면 학교에서 단체 영화관람을 했다
간디. 진용 등등등
고등학교 때부터 시험이 끝나면 밤을 새면서 최고 하루 11편의 비디오를 봤다
대학교 때부터는 연애는 영화관이요
시사회는 기본이며 평일 영화관에 가는 것이 루틴이었다
중국영화 이제 배우가 아닌 감독을 좋아하게 되면서
감독 영화를 쫓아다녔다
해외로 떠나기 직전까지 부산영화제를 10년 동안 꾸준히
다양하게 즐겼다
중문과를 졸업하고 영화 뮤지컬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 후배 선배들이 생기면서 배우들을 가까이서 만나 이야기 할 수 기회도 생기고 부산 앞바다에서 소주한잔 기울이기도 하면서 나의 영화에 대한 짝사랑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문화콘텐츠를 전공을 하기 위해 논문으로 중국영화를 박사과정을 하면서 대만영화에 빠져 연구해보겠다고 현실을 망각하기도 했다
영화제 스태프로 장편영화 영화 제작 PD도 하면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줄 알았으나 나가면 두발 도망가더라
흘러흘러 논문은 마무리를 하지 못했고 지금의 나는 영화관이 놀이터이며 꿈을 꾸는 장소였으며 아프리카에서도 영화를 포기하지 못했던 나인데
23년 이후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짜치는 핑계이고 문화를 축제를 웃기는 소리이고
문화재단 들어와서 돈 계산 아니 숫자 노름이나 하고 있으니
내 자신이 짜친다
피똥싸게 노력하면 될 줄 알았어
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영화 언저리에라도 매달려 있을 줄 알았어
마흔 끝자락에 여전히 꿈을 쫓아 가고 싶은 순정
꿈 같은 소리 하고 있는 순정
5년 뒤 3년 뒤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날개짓하며 바둥거리길 잠시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