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예술의 경계, 조지 나카시마
하루에 적어도 한 번씩은 사용하는 제품이 무엇이 있을까? 핸드폰? 이어폰? 혹은 컴퓨터? IT 제품이 발전하기 이전을 생각해보면 항상 마주하는 제품이 있다. 바로 의자(椅子)다. 아침에 출근길에 버스와 지하철에 자리가 나면 반갑기도 하고, 퇴근길에 다리가 아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도 의자다. 일을 할 때도, 식사를 할 때도 항상 자리를 지켜주는 의자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아닐까?
이러한 의자는 건축과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디자인 중 하나다. 실제로 의자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며 사람들과 함께 지내왔다. 과거에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집권 계층의 존엄과 위엄의 아이콘으로 사용되었다. 동양의 역사에서는 왕이 앉는 의자를 옥좌라고 부르며 권위의 아이콘으로 등장하였다. 현재에도 회의를 주재하고 절차에 따라 운영하는 사람을 의장(chairma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국회에서는 공석 회의 자리를 '의석'이라 표현한다. 이는 의자의 권위적인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모던 건축의 3대 대가로 불리는 '미스 반 데어 로어', 시대가 나은 바르셀로나의 장인 '안토니오 가우디'의 의자, 덴마크의 디자인 명인 '아르네 야콥센' 모두 기억에 각인될 멋진 의자를 디자인했었다. 의자는 창작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방할 수 있는 상징적인 제품이기 때문인 것 같다.
20살이 갓 지난 무렵에는 이러한 의자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비슷한 콘셉트의 인테리어로 무장한 카페와 음식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에서 발견한 하나의 의자와 장인에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 장인의 이름은 '조지 나카시마'(中島勝寿, George Katsutoshi Nakashima)다.
처음 접하게 된 조지 나카시마의 의자는 실용적이고 특이한 형태를 보이며 새롭고, 창의적이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의자들과는 달랐다. 자연에서 있는 그대로를 옮긴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많이 보았던 의자는 자연과 가공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느낌이 강했다면, 조지 나카시마의 의자는 있는 그대로, 장식보다는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연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조지 나카시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친구들도 많았다. 쉽게 그를 설명한다면 스티브 잡스를 빼놓을 수 없다. 자신만의 기준이 엄격했던 스티브 잡스는 집 안에 많은 물건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스티브 잡스가 집 거실에 유일하게 두었던 의자가 있었다. 그 의자가 바로 조지 나카시마의 디자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실용성을 강조한 형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상황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의자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나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같지만 같지 않은 의자들, 그리고 자연이 살아 숨 쉴 것 같은 형태... 이러한 의자를 디자인한 그는 누굴까 하는 궁금함에 조지 나카시마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거주했던 일본계 2세로, 워싱턴에서 출생한 미국 기술 운동의 20세기 디자인과 목제 가구의 제작의 장인, 그리고 건축가이다. 그는 워싱턴 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원에서 바로 MIT 대학원으로 이적하여
건축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한다. 그 후 1933년, 세계 일주를 떠나게 된다. 런던과 파리 그리고 스위스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현장을 다녔고, 레이몬드의 건축 설계 사무소에 입사하여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국을 통해 일본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도쿄 사무소를 개설한 안토닌 레이먼드의 사무소에 들어가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37년, 조지 나카시마는 레이몬드 건축 사무소의 현장 관리자로서 인도에 가여 쉬리, 오로빈도, 아슈 람의 Golconde 기숙사의 설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때 교단의 사상에 공감하고 2년간 수도자와 공동생활을 하며 수도승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그는 결혼 후 시애틀과 캘리포니아에 건축 여행을 떠나는데 뛰어난 재능과 함께 많은 구설수에 오르는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에 실망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새로운 길을 찾게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을 찾고자 결심하였다. 그 결심은 가구의 세계에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결심을 통해 의자의 길에 접어든 1942년쯤, 진주만 습격으로 인해 미국과 일본의 터팽양 전쟁이 개전되었다. 이 문제로 일본계는 강제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 억류 과정에서 조지 나카시마는 일본계 2세인 목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보호와 감독을 통해서 전통적인 일본 목수직에 대해 배우고 습득하게 되며, 전통적인 일본 핸드메이드 및 가구 제조업 기술을 훈련받았다.
당시의 경험은 조지 나카시마가 본인의 가구 세계를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의 초기 작업들을 보면 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일본인들의 건축과 가구에서 보이는 정갈한 모습의 디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조지 나카시마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집 차고를 공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곳에서 나무를 기반으로 한 정갈하고 독자적인 가구 제작에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한 가구는 AIA(미국건축협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그의 가구 세계를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영광에도 그는 끊임없는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나무를 유기적으로 표현하며, 나무의 옹이와 마디, 그리고 나무 결이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는 나무를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를 지속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계의 의자 역사에 길이 남을 코노이드(Conoid) 시리즈, 미라(Mira) 시리즈 등 그의 여러 디자인 작품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며 이를 정갈하게 가공하는 의자를 통해 구현되었다. 아마도 조지 나카시마는 탐구하고 구현하는 과정에서, 인도에서의 자연을 숭배하는 사상과 수도승의 삶, 그리고 일본 전통의 장인 정신이 조합되어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방향의 디자인을 제시하게 된 것 같다.
그의 디자인을 찾아보면 나무의 자연적인 그대로 모습을 살리는 형태를 쉽사리 찾게 된다. 나무의 결과 선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간결하다. 또한 그가 건축가 출신이기 때문일까? 그의 독특한 세계관의 의자는 실용성까지 겸비되어있다. 본인의 독특한 세계관이 중심이 된 아트 작품이 아닌 사람들이 사용하는데 있어 편리함도 고려한 것이 그의 디자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지 나카시마의 디자인은 집 안에 놓이는 다양한 종류의 가구를 포용하기 시작한다. 의자와 테이블, 소파와 전등 그리고 수납장까지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스티브 잡스는 선불교 신도로서 학문적인 기반보다는 선불교의 직관력, 단순함, 미니멀리즘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했다. 선불교의 선(禪)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깨달음을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나무에 담긴 자연에 대한 경 외로움과 이를 자연스러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승화시킨 조지 나카시마의 의자를 집에 두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인 자연, 그리고 그 자연을 대표하는 메타포인 나무. 그리고 이러한 나무의 질감을 살리며, 인의적으로 제약을 두지 않는 디자인. 그리고 사용하며 묻어나는 손 때와 시간의 흐름에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흔적. 지금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는 디자인이 그가 가진 철학이 아닐까?
아우프헤벤(Aufheben) 법칙이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물에 관한 모순, 대립, 부정을 매개로 하여 더욱 고차원적인 발전을 이루고 통일하는 법칙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매체는 서로 상호 부정을 하는 관계다. 하지만 이 두 매체는 서로 부정을 하며 서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준다. 이는 한 단계 높은 생성으로 이루어지고, 불가결의 계기로서 지양되는 것이라고 한다.
조지 나카시마는 아우프헤벤의 법칙을 구현한 시대의 아티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철학과 실용성과 같은 현실의 벽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존재를 섞어 한 차원 높은 단계의 디자인을 구현하였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항상 자신의 철학과 색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 타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 조지 나카시마는 작고한지 30년이 지났지만, 21세기의 많은 디자이너에게 아직도 큰 영향과 깨달음을 주는 장인임에 변함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