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방식에 관하여
코로나19가 미친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글감으로서는 이제 다소 피로한 주제다. 2020년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에 처음 등장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코로나19에 관하여 너무나도 많은 정보와 그에 대한 의견들이 있어온 까닭이다. 변호사 시장으로 시야를 좁혀보면, 고객 및 사건 수가 감소했다거나 진행 중인 소송이 지연되며 사무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다만 오늘은 이렇게 진부하고 우울한 이야기에서 잠깐 시선을 돌려, 직업으로서의 변호사와 관련하여 코로나19라는 위기에서 발견한 조금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나는 로펌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변호사가 되기 전부터 나름대로 꿈꿔온 사회적 기여를 실현하기 위해 비영리단체로 이직했다. 로펌에서는 변호사가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직 내부에 다양한 협업구조가 설계되어 있었는데, 비영리단체에서는 아무래도 로펌과 같은 업무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업무의 파트너로서 세세하게 신경써주시는 비서님도, 법원이나 등기소에서 직접 발로 뛰어주시는 송무팀 직원분들도, 휘황찬란한 회의실이나 출장을 도와주시는 기사님들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부재에 익숙해지는 것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현재 대부분의 민사소송과 행정소송은 전자소송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아직 형사소송에는 전자소송이 도입되지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자소송시스템은 몇 번 사용해보면 이메일 발송만큼이나 쉽게 서면을 제출하고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변론기일을 제외하고는 소송 때문에 법원을 방문할 일이 많지 않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언제든 소송진행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등기의 경우 아직 완전히 전산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법인등기를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이상 직접 등기신청을 할 일은 많지 않을 테다. 회의실은 전보다는 좁고 덜 세련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과 뜻이 맞는다면 회의실의 인테리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때부터였을까, 변호사는 반드시 사무실과 직원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에게도 그 무섭다는 개업병이 찾아와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몸은 사무실에 나가지만 출퇴근길에 매번 ‘개업팁’, ‘개업후기’, ‘영업방법’ 같은 이상한 키워드를 몰래 검색해보곤 했다. 그러던 와중 우리 일상의 뿌리를 뒤흔든 코로나19가 유행하게 된다. 업무적인 측면에서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부분은, 재택근무와 화상회의의 비중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심지어 그 보수적이라는 법조계에서조차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늘어날수록 재택근무, 화상 회의, 온라인 교육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연대는 느슨해졌지만, 효율은 도리어 상승했다.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이런 분위기면 진짜 사무실 없어도 개업할 수 있겠는데?”
물론 전반적으로 경기가 침체되던 초기 코로나19 상황에서의 개업은 나의 부족한 능력과 경력에 비추어 도박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사무실 없이 재택근무를 하는 방식을 통해 제로 코스트로 개업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초기에 투자되는 고정비가 적다면 그만큼 매출에 대한 압박도 약하기 때문이다.
이후의 스토리는 사무실 임대차와 직원 채용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일반 개업변호사와 비슷하다. 기존 사무실에서 시원섭섭한 송별회를 하고, 허접하게 새로운 사무실 이름을 만들었다. 어색한 디자인의 명함을 파고, 낑낑대며 사업자등록을 하고, 사실상 전시용으로만 사용될 문구류를 샀다. 집에 데스크탑과 복합기가 있었기 때문에 개업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참고로 비슷한 방식으로 개업하신 1인 변호사님들의 경우 온라인 비서서비스, 인터넷전화서비스를 사용하여 조금 더 체계적으로 사무실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다행히 개인고객을 대상으로 한 송무보다는 기업, 공공기관, 비영리단체를 대상으로 한 자문, 교육, 연구의 업무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굳이 멋진 회의실이나 응대를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는 없었고, 감사하게도 그 덕에 지금까지 어떻게든 먹고 살고 있다.
괜한 자격지심일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변호사가 이렇게 사무실을 운영하는 방식이 궁상이라고 흉을 볼 수도 있겠다. 나는 이전에 비영리단체에서 변호사로서 설익은 뜻을 갖고 해왔던 공익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개업을 했으니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라며, 공익활동은 젊은 시절 푸릇푸릇한 치기로 행한 잠시의 일탈이라고 핑계 대며 과거의 활동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공익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나, 사회적 가치 추구와 경제활동을 병행하는 사회적 기업 중 법률비용을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규모 있는 조직이 많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사무실 운영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최대한 원가를 절감하고 합리적인 서비스 가격을 하기 위해 궁구한 나름의 결과물인 것이다.
작성하다보니 조금 낯부끄러운 이야기가 되었지만, 다행히 최근 나의 궁상을 포장할 수 있는 세련된 영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노마드(Digital Nomad)나 워케이션(workcation)이 그것이다. 디지털노마드는 디지털 장비를 통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워케이션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원하는 곳에서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새로운 근무방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고정된 장소와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에 있다.
아직 변론기일이나 조정기일의 출석까지 온라인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소송을 할 수밖에 없는 변호사가 완전한 노마드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조정이나 증인신문 등을 중심으로 화상을 통한 재판 진행이 시도되고 있고, 코로나19가 종식된다고 하여 이러한 흐름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프로젝트 기반으로 일하는 변호사들은 업무형태의 전환이 더욱 용이할 것이다. 때문에 장차 변호사 직역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변호사들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이 글은 디지털노마드라는 근무유형을 예찬하기 위해서만 쓴 것은 아니다. 디지털노마드는 그야말로 유목민으로서 안정적인 매출을 담보하는 고정된 조직이나 사업장이 없으므로, 끊임없는 불안과 싸워야 한다. 소송의 준비나 법률검토를 늘 혼자서 할 수밖에 없어 언제나 외로운 싸움을 해야한다는 쓸쓸함도 있다. 그러나 치열하게 서면이나 의견서를 쓰다가 카페 창문밖으로 펼쳐진 바다나 산의 풍경을 보면, 복잡했던 머리 속이 개운해진다. 그러한 위안만으로도, 이렇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변호사라는 직업은 참 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할만한 것 같다. 다음 주는 부산에 가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