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직 독서뿐'인 것인가
0. 독서습관 계발서
제가 생각하는 자기계발서의 정의는, '어떻게'나 '왜'라는 질문 없이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무엇을 해야한다'는 내용만 있는 책입니다. 이러한 정의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이 책은 독서습관이라는 분야의 자기계발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책의 종류와 구분에 따른 구체적인 독서방법이나 독서를 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 목표의 제시 없이 그저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찬양과 옛사람들의 독서법을 따르라는 이야기만 가득하거든요. 주관적 견해로는 조금은 편하게 쓴 글(?)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하나의 주제만을 고집스럽게 파고들며 반복되는 구절에서는 독서에 대한 고집과 우직한 힘이 느껴집니다.
1. 정말 '오직 독서뿐'인가?
따지고보면 책은 결국 종이라는 질료를 이용하여 인류가 축적해 온 데이터를 텍스트의 형태로 보관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 낭만이 없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데이터의 보관과 전달수단이 책의 본질인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굳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장 스마트폰을 들고 유투브에 접속만해도 여러가지 데이터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말이에요. 물론 책은 그러한 자료들보다는 좀 더 정제된 컨텐츠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최근 출판되는 책들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동영상도 사진도 전부 고밀도의 데이터를 담고 있는데, 아직도 과거의 데이터 보관수단이었던 책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책은 독서에 대한 칭송이 가득하지만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문에서 속도만 빨라지고 인내심은 없어지는 세태,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주체적인 사고와 성찰의 부재를 지적하면서, 독서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즉효 처방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책의 중요성은 책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불편의 미학'에 있지 않나 해요. 책은 동영상이나 그림과 달리 독자가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해야 하는 매체입니다. 즉, 데이터 전달의 진행여부, 전달속도, 수용방식이 전부 데이터를 받는 독자에게 달려있는 것이지요. 책이 갖는 매체로서의 특성인 '능동성'이나 '주체성'이 독서를 아직까지 살아남게 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한 능동적, 주체적 이해를 바탕으로 독자는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삶을 성찰할 수 있게 되니까요. 아직 (대부분의 경우) 영상이나 사진만으로는 이러한 효과를 달성하기 힘들지요.
이 책에서도 연암 박지원은 "저 허공 속을 울며 나는 것은 얼마나 살아 숨쉬는가? 그런데 이를 적막하게 '鳥'란 한 글자로 말살시켜 버리면, 빛깔도 볼 수 없고 그 모습과 소리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글자와 문장이 독서의 본질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독서를 하는 이유 : 변화
제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깨우침을 통해 독서를 하기 전 후 어떤 방향으로든 행동과 생각에 변화를 일으키기위함입니다. "책을 읽고 나면 눈빛부터 달라진다"거나, 반구저기(反求諸己; 자기에게서 돌이켜 구하다)의 자세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 책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좋은 독서는 선입견과 분별로 가리워진 눈을 밝히고 인생에 행복과 활력을 줍니다.
독서의 목적이 그러하다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권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1년에 한권만 읽더라도 그로써 자신의 삶을 바뀌었다면 유익한 독서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책을 읽다보면 일단 끝까지 읽는데만 의의를 두는 경우가 생기는데(저의 안좋은 습관입니다), 경계해야 할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독서량은 중요하지 않지만 독서횟수는 중요한 것 같아요. 다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초독과 재독의 이해의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초독은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고 따라가는데 바쁘지만, 재독은 자신의 시각에서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이라면 3회 이상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3. 책의 범람
옛사람들은 손때가 타는 것도 주의하며 책 한권 한권을 소중하게 아꼈지만, 서점에 책이 넘쳐나는 지금은 책 관리의 중요성은 예전보다 떨어졌죠. 대신 그보다 좋은 책을 고르는 행위가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많은 책이 출판되는만큼 어떤 책을 읽어야하는지의 선택은 좋은 독서의 출발이자 핵심적 지점입니다. 요새는 단순히 자신에게 안맞는 책이아니라 객관적으로 작가나 편집자의 자질이 의심이 되는 책도 많이 출판되는 것 같아요.
또한 독립출판을 하는 서점이나 개인들이 많아지면서 선택의 다양성은 더욱 넓어졌습니다. 독립출판물이라고 기성출판물에 비하여 퀄리티에 의미있는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책을 고르는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넓은 선택지 때문에 상당히 피곤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믿을만한 지인이 추천하거나 명사들이 추천한 책을 읽는게 가장 안전한 길이겠습니다만, 그마저도 개인마다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니 용이하지 않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책을 고르는지 궁금합니다.
4. 시간, 장소, 자세
이 책은 독서하는 시간과 자세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독서는 '닭이 울면 일어나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아 간밤에 읽었던 것을 헤아'리고, '묵좌를 하며 뜬 생각을 다스리면서' 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저는 보통 방안에 누워서 독서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책상 위는 컴퓨터나 서류로 여유 공간이 없을뿐더러,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몸이 게을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워서 책을 읽다보면, 눈은 글자를 읽는데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쉬운 소설은 괜찮은데 집중이 필요한 비문학서적은 특히 누워서 보기 힘들어요. 때문에 책에서 소개하는 자세의 중요성은 새겨들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벽의 독서에 관한 내용이 마음에 들고 길들여보고 싶은 습관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독서를 하는 장소도 꽤 중요하다고 봅니다. 옛사람들은 (양반을 기준으로) 넓고 조용한 집이 독서하기 최적의 장소였지만 현대인의 주거형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각자의 방이 마당으로 구획되어 있지도 않고, 도시의 소음도 심하며, 집안에 물건이 많아 쉽사리 주의가 산만해집니다. 집에 독서하기 좋은 공간을 만들어 두고 싶네요.
5. 덧
- 이덕무는 '삶에 시련이 있을 때마다 큰 소리로 논어를 읽으면 답답한 기운을 가라앉히고 강개한 마음을 다졌다'고 술회합니다. 언제나 믿고 의지하며 삶과 생각을 지탱해주는 책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 고결함을 추구했던 선비들의 글이라서 그런지, 정민 교수님의 번역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이 책에는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고요한 문장이 많습니다. 인상깊었던 구절을 소개합니다.
한밤중에 가만히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끓이노라면 온 세상은 적막한데 성근 종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이처럼 해맑은 광경 속에 책과 마주하여 피곤을 잊고, 이부자리를 걷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첫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왕래도 끊고 서책만 앞에 가득하다. 흥에 따라 뽑아서 뒤적인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귀에 들려,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로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하고 적막한 것이 두번째 즐거움이다. 또 한 해도 늦어 잎 다 진 숲에 싸락눈이 살풋 내리거나 흰 눈이 쌓였을 때, 바람은 마른 가지를 흔들고, 찬 새는 들판에서 우짖는다. 방안에서 난로를 끼고 앉아 차 향기에 술이 익는다. 예전 지은 것을 읊조려 외우노라면 완연히 좋은 벗과 마주한 것만 같다. 이러한 정경이야말로 세번째 즐거움이다.
(정민, 오직독서뿐, 김영사,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