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호사 J Jul 30. 2021

<안나카레니나> - 톨스토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0. 장인의 손길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에 관한 이 소설의 첫문장은 수많은 인용으로 이제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 첫문장 그대로, 안나 카레니나에는 행복한 하나의 가정, 그리고 불행을 겪는 수많은 가정이 등장합니다. 즉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가정소설의 형태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다양한 가정이 겪는 행복과 불행에 현실적인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력한 리얼리즘을 채택합니다. 이를 위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한명 한명의 성격과 사상은 장인의 눈길로 세심하게 다듬어지고, 그들을 둘러싼 시공간까지 새롭게 재창조됩니다. 그리고 독자는 소설 속의 살아 움직이는 세상에 대해 놀라운 몰입과 공감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느낀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1. 안나, 브론스키

마음에 드는 한 쌍은 아니지만, 기차에서 브론스키와의 첫만남을 포함한 안나의 등장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인형 같은 미모는 아니지만, 매혹적인 생기를 가진 기품있고 매력적인 젊은 귀부인 안나. 안나는 브론스키와 운명과도 같은 불륜에 빠지나, 전 연인이었던 키티를 버린 브론스키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합니다. 한편 브론스키는 안나와의 사랑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성공의 기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사교계에서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불륜남이라는 명예로운 이미지를 차지한 것에 남몰래 뿌듯해하기도 합니다. 이후 안나가 카레닌과의 이혼에 실패하자 둘 사이의 작위성과 가식은 절정에 이르고, 이미 관계를 잠식해버린 권태와 지루함은 끊없는 질투와 싸움으로 이어지며 처절한 비극을 낳게 되지요. 허위와 통속이 내재된 사랑에서는 그 외의 결말은 잉태될 수 없다는 것일까요.



2. 레빈, 키티

레빈은 이 작품에서 가장 큰 정신적 성장을 겪는 인물입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면, 실제 톨스토이가 추구했던 사상이 가장 많이 반영된 인물로도 평가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키티 또한 브론스키와의 결별 이후 바렌카와의 만남과 정신적인 삶에 대한 경험, 니콜라이의 죽음, 레빈과의 결혼과 출산 등의 굵직한 사건을 거치며, 철없던 사교계 소녀에서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이자 레빈의 든든한 동반자로 성장합니다.

레빈과 키티가 스케이트장에서 썸을 타는 장면, 파티에서 재회하고 수수께끼 같은 단어의 초성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레빈과 키티의 결혼식 장면은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이 소설에서도 가장 낭만적이고 귀여운 내용으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3. 왜 안나의 사랑은 불행이 되었고, 레빈의 사랑은 행복이 되었나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초독 때는 길디긴 러시아 이름과 3편이나 되는 이야기의 흐름을 좇느라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든 생각은 바로 위 제목과 같은 질문이었어요. 현실성이 가득한 이 소설에서도 레빈과 키티,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문학적 장치로서 강렬한 병렬적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가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결말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관하여는 불륜을 저지른 안나에 대한 종교적 심판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짧은 생각으로는, 안나의 비극적 결말을 종교적 단죄라고 단정하는 분석은 이 작품을 평가절하하는 해석이 아닌가 해요. 안나 카레니나는 기본적으로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삶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인문적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본다면, 안나의 비극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고민부족'과 '진정한 합일을 이루게 하는 사랑으로서의 순수성 결여'에서 초래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삶의 방향과 의미, 신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는 레빈과 달리, 안나와 브론스키는 그때그때 닥치는 현실의 사건들에 몸과 마음을 내맡길 뿐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철학적 수준의 사유를 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안나는 카레닌의 관대함을 대할 때, 이혼에 관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한 자리에서 끝없이 표류하기만 할 뿐 과거라는 울타리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지요. 브론스키와의 관계에서도, 실존하는 존재 사이에서의 진정한 소통보다는 통속적인 사랑이 주는 도취감, 불륜이 주는 낭만에 대한 만족감, 복종과 지배에서 오는 일시적 충만감이 안나의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실존적 이해에 뿌리를 내린 관계가 아니다보니, 이혼이라는 현실적 여건을 극복할 수 없게 되자 사랑이라는 꽃이 쉽사리 시들어 버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서로를 존재 깊이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관념 자체를 사랑했던 것인지의 차이라고 할까요.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4. 다시, 레빈

이 소설의 문제의식은 레빈이라는 인물의 내적갈등으로 귀결됩니다. 제목 때문에 안나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나는 반면교사일뿐 진주인공은 레빈인 것이지요. 실제로 안나의 죽음 이후에도 소설은 계속되며 레빈이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시점에서 비로소 마무리됩니다.

레빈이 내적 갈등을 통해 얻은 첫번째 결실은 건초더미 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얻은 생산적 노동과 소박한 삶의 가치에 대한 사색입니다. 이 시점을 전후로 하여 레빈의 관심은 농업생산량이나 농업기술 등 사회과학적 문제에서 러시아적 농민의 특성과 삶에 있어 노동의 의미 등 인문학적 의미로 옮아오게 되며, 튼튼한 농(農)적 철학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 키티와의 사랑과 결혼, 출산 등 개인적 중대사를 겪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돌아온 레빈은, 한 농부와의 대화를 통해 선의 율법과 신의 존재를 각성하며 그간의 혼란과 고민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을 얻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마무리는 레빈의 무신론적 성향과 3권에 걸쳐 두텁게 쌓아올린 철학적 사유의 과정에 비하면 너무 손쉬운 결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해석에 개방된 형태의 결말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당시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렇게 결말을 지은 것인지, 아니면 대문호의 사상에 대한 저의 이해 부족때문에 이런 생각이 든 것인지 모르겠네요.




5. 덧

- 이 소설에는 두 쌍의 커플 말고도 매력적인 인물이 넘쳐납니다. 그 중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 레빈의 형인 세르게이는 세속적 성공을 거두나 개인적 삶이 불행하였다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에 서 있습니다. 두 인물 모두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철학은 부재하였고, 이 때문에 정작 각자 겪는 인생의 위기에서는 미숙하고 무기력합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본래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신비주의적 기독교에 경도되거나 슬라브족 의용군에 관한 정치활동에 투신하는 등 지성의 빛마저 흐려지는 모습을 보이지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작가는 이들의 입을 통하여 정치참여와 통치구조, 민중의 교육과 계몽, 노동과 자본의 관계, 예술과 철학, 토지분배의 문제 등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도 합니다.

- 대체 왜 그러한 설정이 등장하였는지 모르겠는데, 브론스키는 탈모입니다(ㅠㅠ). 러시아에 탈모를 겪는 남성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브론스키의 인생이 외연적 화려함과는 달리 내적으로 공허하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상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픈 부분이 아닐지...

- 문학의 주된 역할은 사상이나 정보의 전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비문학 텍스트와 구별이 되지 않지요. 그보다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여러 사회, 문화적 세계관 내에서 인물들의 갈등과 감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독자에게 이를 간접적으로 체험시킴으로써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 문학이 갖는 독자적 의의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인물의 외모, 행동, 습관, 성격에 관한 정교한 연출을 통하여 문학의 본래 의의에 충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자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갈등과 감정에 관한 내적 경험의 축적을 통하여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고, 특유의 문학적 충실성 덕분에 독서를 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생 곁에 두고 가까이해야 할만한 멋진 작품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직 독서뿐> - 정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