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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호사 J Aug 01. 2021

<데미안> - 헤르만 헤세

흔들리는 지남철


0. 단순한 성장소설인가?


흔히 데미안은 10대나 20대가 읽어야 할 성장소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소설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사춘기와 청년기에 데미안을 포함한 여러 인도자들을 만나면서 수 차례 정신적 성장을 하게 되죠.


그러나 성장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성인들에게도 작품이 갖는 울림이 작지 않습니다. 오히려 데미안은 완고한 관념과 생각을 갖추게 된 어른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한 소설로서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알을 깨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행위는 '알'에 갇힌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니까요.




1.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인 이유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될 때부터 진정한 정신적 성장을 이루기까지 데미안,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에바부인 등 수많은 조력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조력자들의 목소리는 싱클레어의 영혼과 만나 공명하며 그를 이끌기에 더 큰 의미를 갖고, 때문에 작품의 이름도 대표적인 조력자 중 한명인 '데미안'으로 붙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작품에 등장하는 조력자들에게 무게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성장소설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싱클레어 내면의 성찰과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성장이라는 과실을 일구어내는 이야기로 전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목도 '싱클레어'가 되어야겠지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당시 1차 대전으로 지치고 피폐해진 독일의 젊은 영혼들에 대하여 이 작품이 각자의 데미안이 됨으로써 작가가 위로를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이 책을 따스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2. 몽환적인 분위기와 동양문화의 잔상


소설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몽환적이며, 도처에 은유적인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헤매는 광적인 수행자이고, 데미안은 이른 나이에 이미 탈인간의 수준에 이른 완성형 인격체이며, 피스토리우스는 신비주의적 염세주의자이고, 에바부인은 종교적 숭고함까지 갖춘 숭배의 대상입니다. 반면 이야기의 구체성과 개연성에 관하여는 의도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예컨대 데미안이 프란츠 크로머에게 어떤 '조치'를 취한 것인지 끝까지 드러나지 않고, 대부분의 전개는 우연한 만남이나 꿈의 이끌림, 환각과 같은 현상에서 시작된다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소설적 분위기 때문에 애초에 데미안은 실존 인물이 아닌 싱클레어의 또 다른 인격이라는 해석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분위기나 이야기의 전개가 어떠한 발상에서 그와 같이 설정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는 작가가 그러한 영화적 반전을 의도했다고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헤르만 헤세가 정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데미안이라는 소설에 착안하였다는 점에 미루어, 작가의 그러한 개인적 경험이 소설 전반에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해석의 여지 덕분에 데미안은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사랑받게 된 작품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데미안이 명상을 통해 깊은 몰입에 빠지는 부분이나, 성장의 모습을 마치 돈오의 순간처럼 묘사한 내용에서는 동양문화의 은은한 잔상도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후속작품 중 '싯다르타'가 있는 것을 보면 영 무리한 인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학적 색채의 다양함도 작품의 매력을 높이는 데 일조합니다.





3. 지남철이 불안한 전율을 멈춘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지남철이 아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저서에 실렸던 민영규 교수님의 시에서 발췌한 문구입니다.


싱클레어는 선과 악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과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시작으로, 성경에 나오는 카인의 표식에 관한 데미안의 새로운 해석, 베아트리체에 의한 회복과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알게 된 아브락사스의 의미, 에바부인이 갖는 두가지 상징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스스로의 알을 깨기 위하여 분투합니다.


드디어 알을 깨고 나온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사건 이후 처음으로 첫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프란츠 크로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떠납니다. 홀로 남겨진 싱클레어는 자신의 운명을 찾는 자로서 이제 데미안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싱클레어는 선과 악,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의 기준을 외부에 복종함으로써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는, 그럼으로써 내적 신념과 소신을 새롭게 세워나가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명의 길을 더듬어 찾아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 그러한 각성은 고독하고 언제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지남철이 항상 떨릴 수밖에 없고, 항상 떨려야만 하는 까닭입니다. 이 책을 읽은 저 또한 스스로의 지남철이 흔들리고 있는지 언제나 경계하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자세를 갖추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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