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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지 Nov 06. 2024

비인간 주체로 인간성 모색하기

청소년소설 『눈과 보이지 않는』

제목: 눈과 보이지 않는 (The Eyes and The impossible) / 오늘의 클래식

저자: 데이브 에거스

그림: 숀 해리스

역자: 송섬별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발행일: 2024-08-14


2024 뉴베리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존 뉴베리상, 혹은 뉴베리 상(Newbery Medal)은 매년 미국 도서관 협회가 수여하는 미국 아동 도서를 위한 문학상이다. 그림책을 대상으로 한 칼데콧상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아동문학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군요.


원서 표지 / 국내판 표지


국내판 표지 및 내지는 폰트를 제외하면 원서와 거의 동일합니다. 넓직한 판형이고, 하드커버지를 둘러싼 양장본입니다. 원서에는 제목에 손글씨체를 사용한 반면, 국내판에서는 깔끔한 느낌을 주는 산세리프 폰트를 채택했습니다. 큼직하고 굵은 글씨체가 아동 청소년이 한 눈에 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1. 인간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 비인간 주체


”무엇보다도 동물은 인간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그중에서도 특히 동물을 단순히 인간의 소유물로 여기고, 세상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동물은 그저 동물이고, 새는 그저 새, 염소는 그저 염소, 들소는 그저 들소입니다.” (서문)


창비어린이 2024 가을호에 특집으로 편성된 「지금, 여기, 어린이」는 현실 속 ‘어린이의 재발견’을 주제로 쓰인 일곱 개의 글을 담았습니다. 오세란 문학평론가는 서두에서 ‘급격한 어린이 수의 감소와 그에 따른 사회 변화로, 어린이를 만나기 쉽지 않아진 요즘이야말로 어린이를 다시 부를 시점’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번 특집은 ‘다양한 장르의 아동청소년문학 지형에서 어린이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현현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이 쏜살같이 흘러가는 것만큼 우리 시대 어린이는 금방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동청소년문학은 특히나 거세게 흘러가는 물살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떠내려가 현실 속 어린이와 청소년과는 멀어지고 글은 그 형식만이 남게 되겠지요.


특집의 첫머리에 자리한 김유진의 <구체적인 화자들>은 지금의 동시가 과연 실제 어린이 자아를 반영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동시는 여태 ‘실패의 역사를 전회’해 왔습니다. 그것은 시라는 서정 장르가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시’는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와 다르게 화자가 세계(서사)에 있는 그대로 투사되는 장르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주어진 배경과 유리될 수 있지만, 시의 화자는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시에서 표현된 것들은 화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정 장르가 추구하는 ‘자기 동일성’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동시는 실패합니다. 동시를 쓰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입니다. 반면 동시로 그려내는 세계의 주인공은 어린이입니다. 이 모순으로 인해 동시는 어린이를 어른의 시선을 반영하는 타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하는 데 그치게 됩니다. 따라서 애당초 어른이 동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에서 ‘명백히 실패가 예견된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따라 현재 동시가 마주한 질문은 ‘타자에 머무르는 어린이를 어떻게 동시의 주체로 투영할 것인가?’입니다. 필자는 ‘비인간 화자’에 주목했습니다. 비인간 화자는 최근 십 년간 아동청소년문학의 지형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 왔습니다. 필자에 따르면 김개미 작가의 『드라큘라의 시』(경자 그림, 2023)에서는 ‘동시의 시적 주체가 완전히 낯선 국면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어린이가 아닌, 심지어는 인간도 아닌 존재가 시의 화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드라큘라의 시』에서 말을 건네는 주인공은 ‘드라큘라’입니다. 대신 ‘타자를 무섭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자에게서 무서움을 느끼는 존재’로 등장하지요. 여태 타자로 여겨져 왔던 드라큘라는 시의 주체로 서게 되면서 주체와 타자의 성격을 동시에 띠게 됩니다. 필자는 이를 두고 ‘기존 동시가 오직 어린이 주체를 찾고 말하느라 어린이와 대척되는 세계를 타자화했던 이분법이 가뿐히 전복된다.’고 평하였습니다. 게다가 드라큘라 화자는 ‘어린이 주체의 자리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어린이를 둘러싼 인식을 넓힐 뿐 아니라 새로운 어린이 독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SF 장르의 소설이나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애니메이션 영화 <월E>에서는 쓰레기 청소 로봇 ‘월E’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로봇은 드라큘라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협력하거나 대립하며 타자로서 오랜 시간 이야기에 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월E는 황폐해진 지구를 복구하는 로봇이자 서사의 주인공으로, 자신의 선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명령만을 수행한다고 여겨지는 타자로서의 로봇이 아니라, 또 다른 로봇 ‘이브’를 위해 우주여행을 감행하는 주체로서 말입니다. 물론 그 과정은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월E는 인간과 다르게 기계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고, 몸체를 해체하고 조립할 수 있으며, 우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배터리가 닳거나 방전되면 생명을 잃습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몸짓으로 의미를 전달하지요. <월E>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서사와는 조금 다른 단계를 밟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명령보다 자신의 선택을 따르는 월E를 보면서 완결된 하나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비인간 주체에 투영된 독특한 상상의 영역은 우리가 하나의 인간성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이고 단일한 어린이 주체를 모색해 온 동시들과 달리 드라큘라 화자는 새로운 주체의 성격을 띤다… 어린이 화자가 아닌 드라큘라 화자가 오히려 어린이 주체의 자리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어린이를 둘러싼 인식을 넓힐 뿐 아니라 새로운 어린이 독자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화자들>, 김유진)


비인간 화자는 드라큘라나 월E처럼 인간의 탈출구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고, 똑같이 표현하려야 표현할 수 없는, 지난한 인간 탐구의 과정을 돌아가는 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2024 뉴베리 대상작 『눈과 보이지 않는』도 마찬가지입니다. 『눈과 보이지 않는』은 서두에서 미리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읽을 것을 당부해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물은 인간을 상징하지 않습니다…이 책에서 동물은 그저 동물이고, 새는 그저 새, 염소는 그저 염소, 들소는 그저 들소입니다.”(서문) 『눈과 보이지 않는』의 주인공은 들개 ‘요하네스’입니다. 요하네스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도 마찬가지로 다람쥐, 갈매기 같은 동물들이죠. 요하네스와 친구들은 계속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결단에 결단을 쌓으면서 이야기를 한층 한층 만들어가지요. 물론 동물만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요컨대 아동청소년문학으로서 『눈과 보이지 않는』은 아동청소년이 예속된 문명의 껍데기에서 시야를 돌려 대자연과 동물들에서 아동청소년을 찾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2. 산다는 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는 섬의 ‘눈’을 담당하는 들개입니다. ‘눈’은 매일 숲속과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특이 사항을 관찰하고 들소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요하네스만큼 ‘눈’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동물은 없을 것입니다. 요하네스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게 소리보다, 빛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우미 눈은 요하네스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도와주는 동물들입니다. 갈매기 버트런트, 다람쥐 소냐, 펠리컨 욜란다, 너구리 앵거스가 요하네스의 도우미 눈입니다. 요하네스는 매일 ‘도우미 눈’과 함께 섬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들소의 지시에 따라 비밀스럽게 움직입니다. 요하네스가 ‘무언가를 보고 들소들에게 알리면, 그들이 해결 방법을 궁리’하고, 도우미 눈들과 동물들이 행동에 나서는 식입니다.


섬의 균형을 수호하는 들소, 들소들의 대리자 ‘눈’을 자처하는 들개, 그런 들개를 사방에서 도와주는 다른 동물들. 『눈과 보이지 않는』은 이 동물들의 시선에서 쓰인 이야기입니다. 요하네스는 평원과 숲을 고루 비추며 생명을 낳는 해를 ‘신’이라고, 구름을 ‘그의 심부름꾼’이라고 일컫습니다. 자기가 천 년 이상 살아왔다고 기억하고, 보트보다, 자동차보다, 심지어는 빛보다 빠르다고 믿습니다. 울타리 속 들소들을 균형의 수호자로 생각하고, 들소들이 자신에게 하사한 ‘눈’의 역할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요하네스는 기분이 좋으면 달리고, 섬의 균형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데 하루하루 매진합니다.


‘예를 들어 공원의 인간들이 공원을 가로지르는 새 오솔길을 만들면, 동물들이 자유롭게 지내던 곳에 찾아오는 인간들이 늘어나면서 균형이 깨지고 만다. 새로운 건물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길, 새로운 규칙. 그 모든 것이 균형에 영향을 준다.’(20쪽)


또 요하네스는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을 자랑스러워하고, 목줄에 묶여 산책하는 반려견을 보면 한껏 비웃어 주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자기와는 다른, 반려견이 누리는 비루한 자유를 말입니다.


‘나는 웃는다. 하 하 후우우우! / 하 하 후우우우! 반려견이라니!… 내가 웃는 건, 녀석들이 반려견 주제에 나처럼 자유로운 척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마치 목줄이 별것 아닌 양, 조금만 있으면 나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는 양, 원한다면 언제든 풀려날 수 있는 양 굴지만, 나는 그 우스운 농담을 아주 신나게 비웃어 버린다. 하 하 후우우우!’(23쪽)


요하네스는 ‘우리의 체계는 썩 괜찮다’고 말합니다. ‘눈’들은 인간의 눈에서 보면 알 수 없는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또 세계를 해석하는 자신만의 시각과 섬의 눈으로서 ‘빛보다 빠르다’는 확고한 자아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읽는 인간의 입장에선 어떤가요? 우리는 요하네스가 반려견을 보듯이 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해는 신이 아니고, 들개는 빛보다 빠를 수 없습니다. 들소 또한 균형을 수호하는 동물이 아니고, 갈매기나 들개가 천 년 이상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시선에서 보면 요하네스는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지요. 요하네스는 자기가 있는 곳이 ‘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섬’이라는 개념 자체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저자의 서문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물은 인간을 상징하지” 않고, “동물은 그저 동물이고, 새는 그저 새, 염소는 그저 염소, 들소는 그저 들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잣대로 요하네스의 생각과 동물들의 사회를 비웃을 수는 없습니다. 그 비웃음은 되려 우리 자신을 찌르는 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허황한 일면, 연극 같은 것을 요하네스의 모습에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인간 또한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향하는 비웃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음은 박지리 작가의 유작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중 일부입니다.


”왜 다 큰 어른들 여럿이 창틀 뒤에 숨어 낄낄대며 새를 구경하는 걸까. 왜 새가 투명한 창에 몸을 부딪힐 때마다 오오, 하고 연민과 환호가 섞인 탄성을 내지르는 걸까. 좁은 베란다에 갇혀서 허둥지둥하는 작은 생물을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방향을 틀기만 하면 뒤쪽 베란다로도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작은 머리가 우습나. 새의 전부인 날개가 꼼짝없이 무용지물이 된 모습이. / 맞아. 그런 건 꽤 웃기지. / 가엾지만 웃긴 건 사실이야.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사랑받는 거고.”


주인공 M은 가족과 함께 베란다에 들어온 참새를 가둬두고 빠져나가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던 때를 회상합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즐거워하던 과거와 다르게 이제는 마냥 웃을 수 없습니다. 면접에서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 안에 갇히기로 결정한 자신의 처지와 참새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M은 오직 면접에서 통과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생각을 꺾어둔 채 미소 짓습니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를 둘러싼 모든 연극에서 자유로운 존재인가? 그에 반해 『눈과 보이지 않는』은 자유로움의 당위성에 관해 말합니다. 자유로움에 관해 자문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우리는 마땅히 자유롭기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하네스는 인간들에게 한번 붙잡혔다가 탈출하면서, 자유가 주는 축복이 얼마나 커다란지, 해방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요하네스는 그 이후로 들소들의 ‘눈’ 역할에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들소들을 바다 건너로 직접 탈출시킬 계획에 몰두합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균형의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맡아온 들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하네스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코요테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또 해는 신이 아니고 섬 바깥에는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바다 너머에서 건너온온 염소 헬렌과 들소들에게 전해 듣게 됩니다. 그러고는 세계가 부서지는 충격에 휩싸이지요. 들소들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오히려 자기가 난데없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자유를 맞닥뜨리게 된 셈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섬에서는 운명을 결정지을 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버트런드가 양궁장 앞을 비행하다 인간이 쏜 화살에 맞아 날개를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들소와 요하네스, 버트런드는 각기 다른 이유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힘에 휩쓸리게 됩니다. 여기서 버트런드, 요하네스, 그리고 들소들은 각자 다른 방향을 선택합니다. 각자의 선택은 자유 앞에 선 위태로운 인간의 단상을 보여줍니다.


’계획에 몰두한 덕분에 나는 내가 처한 난관을 잊을 수 있었고, 버트런드가 말한 사명감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종일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생물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란 걸 지각 있는 동물이라면 누구든 안다. 마음속에 고민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해방의 본질이다. 즉, 자유란 우리가 자신을 잊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다.’ (147쪽)


’들소들은 이 섬 바깥에 섬보다 백만 배나 더 큰 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들소들은 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알았기에 이 모든 이야기를 속삭이듯 나직하게 들려주었다. 내가 알던 모은 경계가 사라지고, 폭발하고, 끝없이 확장되는 우주로 대체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무한한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자 혼란스러웠다.’ (173쪽)


’나는 바다로 달려가 자꾸만 내게 다가오고, 물러갔다 다시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포말이 십억 개의 작고 하얀 다리로 내게 달려왔다가 부서져 사라졌다. 회색빛 도는 푸른 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들소들은 이 모든 걸 알면서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시의 공원 속 우리에 갇힌 신세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도시가 십억 개의 도시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곳이 중요한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작고 별 볼 일 없는 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175쪽)


”그러니까 네 말은, 하늘에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준 둥근 불이 타오르는데, 그분이 신이 아니라는 소리야? 그럼 그분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불덩어리라는 소리야?”…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그저 내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라서 그래. 해는 모든 걸 편안하고 좋게 만들어 주는 신일지도 몰라. 아니면 그저 너와 나, 혹은 새똥이 잔뜩 묻은 바위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고.” (197쪽)


요하네스는 결국 섬을 빠져나가기로 합니다. 진정한 ‘눈’이라면, 세상을 보고 달리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면,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하네스는 이 시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섬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떠나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자신의 이상향을 향해 겁 없이 뛰어들면서 말입니다. 반면 버트런드는 날개를 쓸 수 없게 되자 갈매기의 전통에 따라 최후의 비행을 준비합니다. 더 이상 날 수 없게 된 갈매기는 절벽에서 비행하다 바다에 빠져 명예롭게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갈매기 사이의 전통이자 명예로운 의식인 까닭입니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 요하네스가 버트런드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버트런드는 다른 갈매기와 같은 숙명을 맞을 예정이었습니다. 들소들은 섬을 떠나지 않고 목장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들소들은 애초에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섬에서 생을 마치기로 이미 결정했던 탓입니다.


우리는 이 동물들과 다르지 않게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종용받게 됩니다. 요하네스가 말했듯이 삶은 실제로 복잡합니다. 그럴 때마다 요하네스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칠 것입니다. 요하네스에게 삶이란 떠나는 것, 떠나게 되는 것, 떠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하네스의 시점에서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도 아닙니다. 자유는 오직 자기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움직일 때만 나타납니다. 만약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면, 진정한 ‘눈’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자유를 인식하고 언제든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떠남이 곧 발전 자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요하네스가 메인랜드로 향한 뒤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코요테와 함께 달리면서 세상을 구경할 수도 있어. 세상엔 구경할 게 너무나 많거든. 네가 정말로 눈이라면, 정말 세상을 바라보고 달리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면, 난 네가 함께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 (274쪽)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나도 알고 너희도 알다시피 말이다. / 세상을 마음껏 달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코요테 개라고 할 수 있을까? /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눈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영웅은 앞으로 나아간다. / 산다는 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287쪽)



3. 총평


’동물은 그저 동물이고, 새는 그저 새, 염소는 그저 염소, 들소는 그저 들소’처럼 느껴지는 캐릭터들의 개성과 말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요하네스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책임감 강한 성격은 특히 우리가 아는 들개의 모습을 연상케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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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복잡할 거라고 짐작한 상태에서 실제로 복잡한 삶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좀 더 준비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 말은, 삶이 복잡할 거라고 예상한다면, 그리고 삶이 실제로 복잡하다면, 삶은 단순해진다는 거다. 그렇지 않나? 방금 내가 떠올린 이 멋진 논리를 버트런드에게 말해 줘야겠다. 버트런드는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113쪽)


”우리가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우리에게는 온종일 빵 조각과 감자튀김이나 뜯어 먹는 것 말고 더 고귀한 목적이 필요해. 어쩌면 네가 위험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고, 그 괴상한 사각형들이 잔뜩 들어 있는 이상한 건물에 들여보내는 게 바로 그 고귀한 목적인지도 모르지” (138쪽)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폐하. 위대하신 폐하. 강력하신 폐하. 죄송합니다.” (199쪽)



요하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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