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지 Nov 29. 2024

시대는 공감을 구한다

『공감의 시대』, 『긴긴밤』 공감으로 살아남는 법



두 책을 우연히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긴긴밤』은 직접 구매한 짧은 분량의 동화이고, 『공감의 시대』는 김영사 서포터즈 활동으로 이번 달에 지원받은 과학 분야의 인문 교양서입니다. 저는 두 책이 전혀 다른 장르인데도 어떤 부분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두 책이 캄캄한 지하 통로로 이어진 듯했습니다. 『공감의 시대』에서 서로 감정을 교류하고, 위로하고, 관점을 바꾸는 동물들의 사례를 300쪽에 걸쳐 수도 없이 본 후에 『긴긴밤』을 읽으니 코끼리와 펭귄이 등장하는 동화가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긴긴밤』은 아기 코뿔소를 가족으로 받아준 코끼리 무리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코뿔소 노든은 어느 날 자신이 코끼리가 아닌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정작 코끼리들은 노든의 코나 귀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코끼리는 노든에게 이렇게 말해 주지요.


|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잇으면 돼. 그게 순리야.” 『긴긴밤』, 12쪽


어찌보면 ‘동화적인’ 상상력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공감의 시대』에 따르면 코끼리가 다른 종을 돌보아 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장님 코끼리와 눈이 보이는 코끼리가 서로 살을 맞대고 걷는 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코끼리는 감정 전이부터 관점 바꾸기까지 가능한 높은 수준의 공감 능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 나는 코끼리 자연공원에서 다른 종류의 협동을 마주했다. 장님 코끼리와 눈이 보이는 친구가 함께 걸어 다니는 곳이었다. 두 암컷은 혈연지간이 아니었음에도 같이 붙어 다녔다…. 눈이 보이는 친구가 떠나는 즉시 두 코끼리는 각기 묵직한 소리를 냈고, 심지어 때로는 장님 코끼리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공감의 시대』, 172쪽


『공감의 시대』는 더 나아가 영장류, 원숭이, 돌고래 같이 다양한 종이 본능적으로 다른 개체와 공감과 유대를 나눈다고 말합니다. 어떤 종은 다른 종에 대한 공감을 보이기도 하지요. 침팬치와 닮은 보노보가 이 분야의 대표 주자입니다. 저자는 보노보가 유리벽에 부딪혀 기절한 새를 도와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긴긴밤』이 코끼리가 아기 코뿔소를 돌보아 주고, 코뿔소가 펭귄의 알을 품어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두 책은 다른 버전으로 출시된 하나의 글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무척 놀랍습니다.


| 쿠니라는 암컷 보노보는… 새를 풀어주려고 한 나무의 꼭대기까지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작은 비행기처럼 새의 날개를 펼쳐서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즉 새에게 필요한 부분에 맞춰서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공감의 시대』, 133쪽


| 노든(코뿔소)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펭귄) 주었다… 나는 노든의 가족과 코끼리들, 앙가부, 치쿠와 윔보의 얘기를 들으면서 밤을 견뎠다. 그러다가 내가 잠이 들면 노든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긴긴밤』, 83쪽


아래는 『공감의 시대』 서평입니다.



제목: 공감의 시대 (The Age of Empathy: Natrue’s Lessons for a Kinder Society)

저자: 프란스 드 발

역자: 최재천•안재하

출판사: 김영사

발행일: 2024-11-17 (구판: 2017-08-31 / 원서: 2009년)


※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1. 시대는 공감을 구한다


『공감의 시대』는 이른바 ‘경쟁과 투쟁’이 자연법칙으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에, 다소 어색해 보이는 ‘공감’이 인간과 동물의 종의 생존을 이끌어온 자연적인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2017년에 최채천 교수의 번역본으로 발간된 이후로는 국내 독자들에게도 익히 읽혀왔습니다.


예상컨대 저자는 동물과 인간이 ‘공감’이라는 동질한 사회적 본능을 공유한다는 데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을 천지로 떼어놓으려고 하는 인간중심주의 사상가들과 감정 자체를 등한시하는 냉소주의자들,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극심한 보수주의자들에게 너무나 많이, 그리고 자주 공격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저자는 ‘‘공산주의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손가락질하는 이메일을 받는다고 밝힙니다. ‘공정성, 정의. 얼마나 낭만적이고 쓸데없는 말인가!’라고요(265쪽). 원서가 출간된 2009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공감의 시대』가 불러온 반향은 당연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2009년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공감의 시대』를 발표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무엇보다 차가운 자유 시장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따뜻한 무언가가 시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 『공감의 시대』가 출간된 해인 2017년의 상황도 8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2016년 우리나라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면을 맞았습니다. 국민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하나의 위협 앞에 하나로 뭉쳐 단결한 바 있습니다. 『공감의 시대』는 이러한 유대와 공감이 우리 DNA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하며 그 힘이 개인과 사회에 걸쳐 뻗어나갈 수 있도록 복돋아 주는 책입니다. 저자는 본론에 앞서 현대 사회에 뿌리박힌 인식의 문제점을 하나씩 짚으면서 이 책이 향하고 있는 곳을 명확하게 일러둡니다. 최재천 교수는 옮긴이 서문에서 2017년 당시 한국 사회의 맥을 짚으며 『공감의 시대』가 우리 사회에 전해 줄 의미를 서술하였습니다.


|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넘치도 우러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메말라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번역하며 깨달았습니다. ‘공감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라는 걸. 「옮긴이 서문」, 7쪽


(왼쪽) 원서 / (가운데) 공감의 시대 구판 / (오른쪽) 공감의 시대 개정판


『공감의 시대』는 올해 11월, 개정판으로 새로이 출간되었습니다. 부제를 원서의 것에 더욱 가깝게 바꾸었고* 판형과 표지 디자인을 재단장하였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사진이 프린트된 띠지도 새로 둘렀습니다. 저자는 올해 3월 안타깝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외침은 15년의 세월을 건너 전 세계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2024년에도 유대와 공감은 점점 제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공감은 오직 상대 집단을 공격하고 자기가 속한 이익 집단을 결속할 때만 잠시 이용됩니다. AI 알고리즘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탓에 미디어상에서 일어나는 확증 편향이 더욱 강화되었고, 내집단 안에서만 공감 신경을 뻗치는 내집단 중심주의도 늘었습니다. 경쟁만 부추기며 사람을 쥐어짜는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는 원서가 출간된 2009년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서울의 교통을 책임지는 지하철 기관사들은 안전 운행을 위해 도입되었던 2인 1조 원칙마저 지키지 못할 만큼 인력난을 겪어,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치 판국마저 2017년 대통령을 하야시켰던 그때와 비슷해 보입니다. 『공감의 시대』는 이렇게 진정한 공감을 잊어버린 지금의 사회에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입니다. 공감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남자와 여자, MZ세대와 X세대, 여와 야, 진보와 보수……. 그저 남으로만 남게 된 우리가 과연 진정으로 서로를 위할 날이 올까요?


*구판 부제: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 개정판 부제: 다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 / 원서 부제: Nature’s Lessons for a Kinder Society



2. 인간과 짐승, 사회와 자연,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공감의 시대』는 300페이지에 걸쳐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를 조금씩 무너뜨립니다. 결코 독자가 ‘인간은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동물보다 공감과 협동 능력이 특출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대신 공감은 인간의 것만이 아닌 우리의 조상인 영장류들, 원숭이, 코끼리, 그리고 돌고래와 까마귀에게까지 나타나는 오래된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생물은 진화 과정에서 집단생활을 택했고, 집단생활을 오롯이 유지하기 위해 다른 개체와 공감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입니다. 심지어 영장류와 코끼리 같이 지능이 높은 동물들은 공감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감정 전이’를 넘어 인간의 고유 능력으로 일컬어졌던 ‘관점 바꾸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다른 종의 동물에게도 ‘역지사지’의 태도를 보이곤 합니다.


저자는 인간 또한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협력하는 본능을 키워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인간은 어느 종보다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진화한 듯해 보입니다. 오직 서로를 죽이기 위해 총과 폭탄을 만들었고, 끊임없이 정복하고 지배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기반한 시장에서 경쟁을 부추기고 사람을 쥐어짜며, 종국에 인류는 세계 대전을 일으켜 자멸의 위기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인간의 이기주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감에도 어두운 면이 존재하며, 잔인함 또한 ‘관점 바꾸기’에 기초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285쪽).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서로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 속 수많은 고문 기구는 이를 입증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인간은 분명히 이타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호혜주의를 기반으로 사회를 건설하였고, 호혜주의는 상호 신뢰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 ‘사회적 자본’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회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이타주의적 본성을 ‘다른 이에게 뻗는 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자유주의적 시장 원리를 뜻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이타주의 또한 보이지 않는 시장의 원리 중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렇듯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양쪽 손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 바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사이를 잇는 가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감은 자기중심주의와 이타주의 사이의 간극을 연결해주는 다리로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나의 괴로운 감정으로 바꾸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 마틴호프만(1981)


저자는 이렇듯 자기의 지론이 손을 뻗치는 모든 곳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특히 저자는 이타성을 강조하지만, 무분별한 이타성과는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감에서 비롯된 이타성이 근본 원리인 사회를 지향하지만 무조건적 이타성은 상호주의라는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도 본 것입니다.


*동아일보, 서정보 기자, 「사회는 ‘다른 이에게 뻗는 손’에 의존한다」 (2017. 9. 6), https://weekly.donga.com/culture/article/all/11/1050177/1


『공감의 시대』는 무비판적 합리주의, 실증주의 위에 건설된 허황한 현대 문명과 현대인의 인식을 진단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는 생물학이 결국 ‘공감의 시대’를 열어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이기심과 이타성의 양극성을 지닌 존재로서 최소한 이타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동물을 비롯한 인간이 가진 미덕이자 고대로부터 내려온 본성이며, ‘이 타고난 능력을 불러내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도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303쪽).



유사 도서


(왼쪽) 사피엔스 / (가운데)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 (오른쪽)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최근에 발간한 생물학 서적 <동물 인터넷>, <자연에 답이 있다>보다는 차라리 2011년에 발간한 <사피엔스>와 닮았다. <사피엔스>는 유발 하라리의 인류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 인류 문명화에 대한 ‘거대한 서사’를 성공적으로 직조해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외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베스트/스테디셀러이다. 두 책은 이른바 ‘시대 진단’ 혹은 ‘시국 선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다. 특히 『공감의 시대』는 제목에서부터 그 의도를 분명히 한다. 부제 또한 구판에서는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였으나 개정판에서 “다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으로 수정하며 원작의 의도에 맞추려는 모습을 보였다.


비슷한 주제의 도서로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최재천, 2014),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아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2021)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