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9세지만, 일단, 좀 쉴게요

마케팅 팀장의 휴직. 일단, 무급으로 쉬겠습니다.

by 순남

퇴사냐 휴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처음엔 퇴사를 생각했다. 만 39세에 퇴사를 한다면, 다시 재입사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어떻게든 회사를 떠나고 싶었다. 그동안도 계속 약을 먹으며 버텼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인생이 갉아 먹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q12.jpg?type=w800 불운의 명작 <랭고리얼>, 시간을 갉아먹는 괴물


스티븐킹 원작 영화 랭고리얼에 보면, 시간을 갉아먹는 괴물이 나온다. 그 괴물이 내 인생도 얌얌얌 갉아먹으며 쫓아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탈출하는 것이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서도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회사에서는 퇴사를 보류해 주었다. 3개월 무급 휴직으로 처리해 주었다. 적어도 생각하고 정리하고, 회복할 시간이 3개월은 생겼다.



야호, 휴직자 순남의 탄생



건강 상의 이유로 본의 아니게 쉬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저 대신 다른 팀원들이 인계받아 프로젝트 진행할 예정이니, 후속 업무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형태의 문자 혹은 이메일을 꾹꾹 눌러 담아 수십 군데에 보낸다.

거래처 혹은 대행사, 협력사들은 어머어머, 아이쿠, 헐, 에구머니나, 저런 저런 등의 의성어를 남발했다.

의성어를 앞에 붙이며, 건강하라는 회신이 돌아온다. 건강해지고 나서 꼭 보자는 말을 덧붙인다.


에구머니나, 어째요.ㅠㅠ 건강이 제일이죠. 얼른 회복하시고, 돌아오시면 꼭 뵈어요.


다행인 것은 아무도 건강 상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구나, 다들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구나 싶다. 이 정도 센스와 눈치는 있구나 싶다.

만약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다리나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암에 걸린 것도 아니다. 굳이, 신체를 언급해야 한다면,

뇌가 건강하지 않아요.


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마음이 아파요 라고 한다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신체 부위를 말해야 좀 더 아픔이 잘 전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뇌가 건강하지 않다고 '마음' 속으로 정해놨다.

다행히 굳이 구체적으로 병에 대해 묻는 천진난만한 사람은 없었다.


내 병의 이름은 공황과 우울증입니다.


신경정신과를 다녔다. 그리고 기어코 병원에서는 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진단서에는 담당 선생님은 <원인 불명의 공황 증세와 우울증으로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하다>라고 썼다. 가능하면, 증상과 관련된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빠르게 호전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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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연예인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연예인들이 많이 걸려서. 그리고 연예인처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사고. 지나친 책임감을 느낀다. 과도한 압박감을 느낀다. 작은 위험 신호에도 크게 반응한다.


증상 1

숨 쉬는 게 힘들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공간이 압축해서 짓눌르는 것만 같다. 사무실 바깥으로 토하듯 뛰쳐나와 비상구 계단 통로로 나온다. 거기까지 나오니, 겨우 숨이 쉬어진다. 헉헉헉. 숨을 몰아쉰다. 다시 들어가기 무섭다.


증상 2

"차장님. 이러시면 안 되죠. 그거밖에 안 돼요?"

"이번에 실패한 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다 순남 차장 때문이야."

"일을 못하면 가만히 있지, 왜 저렇게 나서는 거야. 재수 없어. 무능력해."


저 멀리서 회사 동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들리지 않는다. 소머즈도 아니고, 들릴 수가 없다. 다만, 멀리서 웃고 있으면, 그게 나를 두고 웃는 것만 같다. 들리지 않는 말은 나를 욕하는 말로 자동 번역 되어 들린다.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들린다. 워딩이 정확하게 들린다.


퇴사하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휴직자가 되었네요.


이 지경 정도되면, 회사 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 하려고 해도, 오히려 회사에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다. 특히, 팀원이라면 어떻게든 이끌고 가면 된다. 그러나 나는 팀장이다. 팀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다. 선장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배를 이끌지 못한다면, 배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사실은, 퇴사하려고 했다. 그게 당연한 수순이고,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의 변화에 대해서 조금은 눈치를 챈 팀원이나 동료들도 있었기에, 차라리 빨리 말하고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전 날 아내와도 상의했다. 아내는 쏘쿨하게 단번에 괜찮다고 말했다. 다만, 약속 하나만 해달라고 했다.


쉬는 동안 건, 강해지겠다는 약속.

약속하면서 깨달았다. 건강해진다는 말에는 강해진다는 말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약해진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 강한 사람도 되고 건강한 사람도 되는 것이고 ,그러면 만사형통.

결심을 하고 전무님 실에 들어가 사정을 얘기하고 의사를 밝혔다. 전무님은 한참 동안이나 그런 고초가 있었냐며, 들어주셨다. 워낙 성정이 착하고 좋으신 분이라, 그렇게 힘들다면 원하는 대로 하라 하셨다.

남은 사람은 걱정 말라고.


며칠 뒤 전무님은 사장님과 논의해 보고, 퇴사 대신 휴직 3개월을 권유하셨다. 회복해서 돌아와 달라고.

팀장은 공석으로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으로 일단 뽑겠지만, 회복해서 꼭 돌아와서 같이 일하자고.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부담이 덜 되는 직책으로 변경되는 것이고,

3개월이란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생겼으니까.



일단, 글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휴직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7월 17일. 벌써 2주 전의 일이다.(시간 참 빨리 간다.)


좀 더 상황을 객관화하고 ,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의사도 글을 쓰는 것이 도움 된다고 했다. 휴직 생활에 대해 글로 옮겨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이야기는...


만 39세 마케팅 팀장이 생의 한 가운데에서 번아웃으로 상실한 무언가를

3개월 휴직 기간을 통해 되찾는 이야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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