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계정을 지우고서야 시작된 진짜 퇴사
최근에 큰 사건이 있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큰 사건이다.
에미넴이 닥터 드레의 귀에 자기 데모 테이프를 욱여넣었던 것과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진구 구장에서 3루석 안타를 보고, '아, 글을 써야겠다' 결심한 것과 같은.
얼마 전 퇴사를 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
마지막날까지 인수인계하고 가방을 메고 일어서는데 김이사가 정리되지 않은 파일 뭉치를 툭 던졌다. '이것까지만 정리하고 가.' 그의 목소리가 유통기한 지난 우유처럼 끈적거렸다.
덕분에, 거의 다섯 시가 넘게 나왔지만, 그럼에도 작별(Bye)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기쁜 순간이었다.
물론, 이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큰 사건은 아니다.
겨우 마흔 초반 퇴사인걸.
40대에 직장 퇴사하는 거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그냥 다 하는 거잖아요.
(후후, 웃음)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계. 정. 삭. 제.
서른 살쯤부터 인가. 10년 넘게 사귀어 온 친구가 하나 있다. 주로 밤 11시에 만났다. 다들 자기 바쁜 그 시각에 은밀하게. 그는 나를 '소환사'라 불러준 유일한 친구였다.
이니셜이 LOL. 전설적이고 전설적인 리그오브레전드.
소환사의 협곡에서 보낸 시간을 다 합하면, 1만 시간의 법칙을 거뜬히 넘기고도 남을지도 모른다.
헤어지고 만나길 몇 차례, 애증의 관계라, 눈물 흘리며 이별했다가도 금세 하하 호호 사이좋아지기도 한다.
지나치게 사이좋아서, 아내가 질투할 정도다.
퇴사하고,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마땅한데, 오히려 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잠든 뒤, 헤드셋을 끼고, 태블릿 커버가 다 벗겨지도록 문질렀다. '와일드 리프트'의 협곡은 현실의 퇴사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위험한 밀회 장소였다.
회사를 그만둔 건 1번이 회사 다니기 싫었기 때문이고, 2번이 김이사가 싫었기 때문이고 3번이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대 게임을 하기 위해서 그만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매일 세네 시간을 거기에 몰두했다.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슬퍼하고, 그래서 다음 판을 하고, 그냥 또 하고, 계속하고, 남는 건 귀신처럼 붉게 충혈된 눈과 푸른 새벽의 허탈감뿐이었다.
게임을 한다고 남이 피해를 보지는 않는다. 아내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크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한 명, 게임을 많이 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소중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인생이 영화라면, 주인공은 게임을 하고 게임을 했습니다.
또 게임을 했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장면은 없으니, 제작비는 얼마 들지 않겠지만,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럴 바엔 이 영화 왜 만들었지' 싶은 쓰레기 영화.
퇴사하고 한 달을 그렇게 보냈더니, 안 되겠다 싶었다. 아내에게 게임을 안 하기로 선언했다.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계정을 삭제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게임을 지웠다. 그러나 금세 새로 깔고 지우길 반복했었다. 사실 계정 삭제도 처음은 아니다. 벌써 네다섯 번째. 내 인생의 몇천 시간이 거기에 들어갔다는 걸 생각하면, 계정 삭제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여태까지 들어간 게 아니라, 앞으로 들어갈 수만 시간을 생각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경제학에서 뭐라고 하더라.
아, 매몰 비용의 오류!
합리적이지 않은 걸 알면서도 손실을 확정하기 싫어서 본전 생각에 망해가는 주식을 들고 있는 개미의 마음. 나는 내 인생이라는 주식의 대주주로서, 오늘 그 쓰레기 같은 종목을 상장 폐지시켰다. 게임에 들인 시간 때문에 아쉬워할 게 아니라, 그 때문에 앞으로 보전할 시간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전환점인 것이다.
얼마 전에 루틴을 못 잡고, 나태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데, 친구가 말했어.
"그냥 쉬면 그냥 쉬게 되는 듯.. 뭔가 에너지를 쓸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한 거 같더라. 에너지를 비워야 그 자리에 또 뭔가를 채울 수 있달까"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래야 비워지고, 그래야 에너지가 또 채워진다. 에너지가 들어올 자리가 없으면, 당연히 (새롭고 좋은) 에너지가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고여있는 샘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자꾸 퍼내야 맑고 깨끗한 물이 더 흘러 들어와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에너지를 시간에 대입시켜 보면,
퇴사한 나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던 게임을 삭제했으니, 그 빈 시간에 새로운 뭔가가 채워질 것이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시간으로
생각했던 대로 가볍게 글을 써보련다.
편하고 쉽게 별생각 없이.
브런치는 나의 연습장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사소하게 그냥 글 쓰는 시간이 모이고, 소소하고 별거 아닌 글들이 모여,
이건 괜찮지 싶은 글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비워짐의 법칙대로 글 쓰는 것도 자꾸 써서 내 안의 단어들을 내보내야 새롭고 좋은 단어들이 새로 채워지겠지.
퇴사, 롤 계정 삭제, 이제 비로소 무소속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오늘의 순남
번아웃 잔여물 (mg)
15mg (아직 김이사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지만, 지금 현재에 감사할 정도는 됨.)
근거 없는 자신감 (Km/h)
120Km/h (통장 잔고는 줄지만, 왠지 계정 삭제와 함께 다 괜찮을 것 같은 속도.)
뇌 순수도 (Crystal Clear)
99% (내 안의 밝은 부분에 집중.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다가올 저녁 메뉴만 생각함. 매우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