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모닝 말고 슬로우 모닝

내 안의 히틀러를 퇴출하다

by 순남
image.png 거북이처럼 느리게 사는 것도 괜찮다


느리게 살기로 했다

퇴사 2개월 차. 나는 느리게 살기로 했다. 내 인생의 새로운 키워드는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다.

결심은 쉬웠으나 몸에 밴 관성은 무서웠다. 집에서 쉬는 게 불안해지자마자 나는 '미라클 모닝' 모임을 뒤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9시가 넘었다고 눈치를 주는 상사도 없는데 말이다. 내 안에는 여전히 짧은 콧수염을 기른 히틀러 같은 선동가가 살고 있었다. "빨리 적응해! 빨리 소설 써! 빨리 살 빼!" 그는 쉴 새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조직을 나왔음에도 나는 여전히 '빨리빨리'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예전처럼 번아웃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대신, 나는 질문을 던졌다. "왜 다들 미라클 모닝을 하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을까?"

image.png 미라클 모닝이고 나발이고... 피곤


미라클이 아니라 피곤일 뿐이었다

찾다 보니 요즘 미국에서는 '미라클 모닝'보다 '슬로우 모닝(Slow Morning)'이 유행이란다. 미라클 모닝이 성공을 위한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면, 슬로우 모닝은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일어나서 나만을 위한 '리추얼(Ritual)'에 집중하는 운동이다.

그 설명을 읽는 순간, 무릎을 쳤다. "이거다!" 싶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미라클 해지려다 피곤해지는 아침이 아니라, 보다 평온한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애초에 내가 회사를 나온 이유는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직이라는 지우개에 내가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나'라는 존재를 다시 선명하게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image.png 불후의 명곡 걸음이 느린 아이 for 느린 아이


원래 나는 느린 아이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 느린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다른 아기들이 울고 기느라 정신없을 때, 나는 점잖은 선비처럼 가만히 앉아 손가락을 빨며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이 느려 부모님 가슴을 태우기도 했다.

나는 원래 느린 사람이었을 뿐인데, 사회가 정한 '효율'이라는 잣대에 맞춰 나를 채찍질해 왔다. 회사는 이윤을 위해 동일 시간 대비 더 많은 생산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조직에서 벗어났다. 회사가 물들인 '패스트(Fast)'의 방식에서 드디어 해방된 것이다.

슬로우 라이프는 바꾸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대신 슬로우푸드를, 전력질주 대신 슬로우 러닝을 선택하는 일. 이건 누구와의 비교가 아니라, 내 안에 미쳐 날뛰는 야생마 같은 다급함을 달래주는 과정이다. 끈을 조금씩 짧게 잡으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몽골의 말잡이처럼, 나도 나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아내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속도

느리게 걸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내와의 시간이다. 예전에는 "나중에 얘기하자", "내일 출근해야 해"라며 아내와의 대화를 '업무 처리'하듯 해치웠다. 효율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냈던 것이다.

요즘 아내는 자주 웃는다. 지난 2개월 동안 우리는 여태까지 산 시간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진중하게 오래 경청할 수 있는 여유. 상대가 웃으면 나도 행복해지는 그 단순한 진리를 나는 '빨리빨리'를 외치느라 잊고 살았다.

이제 나는 청년이 아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나를 청년으로 껴주는 곳은 서울 도봉구(만 45세 상향)뿐이다. 중년의 나이에 무리해서 달리다간 뼈가 다친다. 뼈가 다치면 더 오래 쉬어야 한다.

image.png 일본에서 대인기, 슬로우 조깅





대충, 그러나 꾸준히 달리는 감각

오늘도 나는 아내와 함께 '슬로우 러닝'을 한다. 페이스는 8~9분. 파워워킹을 하는 아주머니들보다 느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건 지면에서 두 발이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내가 날아오르고 있다는 감각이다.

느리게 가더라도 매일 달릴 수 있는 페이스. 그것이 무직(無職)의 시간을 무능(無能)이 아닌 무한(無限)의 가능성으로 바꾸는 나만의 방식이다. 키스신이 왜 슬로우 비디오로 나오겠는가. 소중한 순간은 천천히 음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무소속 생활도 이제 막 슬로우 비디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순남

번아웃 잔여물 (mg)
5mg (회사 트라우마는 이제 희미한 배경음악 같다.)

근거 없는 자신감 (Km/h)
90Km/h (감속 중. 이제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기어 변경 중.)

뇌 순수도 (Crystal Clear)
99%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MRI 찍으면 파란색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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