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서 오히려 좋은 날
늦잠을 잤다. 연휴가 끝나고, 이제 진짜 새해의 시작이라고 마음속 세상에 큰 소리로 외치고 다짐했건만, 아침 9시에 일어났다. 직장 다닐 때는 이렇게 게으르지 않았는데, 무소속이라고 늦잠 자는 습관이 붙은 걸까 싶어 걱정이다.
괜히 죄책감이 든다. 무소속이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아내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강을 산책하고, 홈플러스에서 장을 보자고 말했다. 군말 없이 환복하고 바로 산책을 시작했다. 흐리긴 했지만, 춥지 않았다. 마라톤 대회를 진행하는지, 화려한 러닝복을 입은 무리들이 달리고, 5km, 6km 표지판이 보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나와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 괜히 패배감이 든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게으른가 싶어서 의문의 1패..)
1시간을 걸어서 홈플러스에 도착했다. 장 보는 걸 좋아한다. 다양한 상품들을 구경하면서, 뭘 살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삼겹살 시식하는 아줌마가 있으면 파블로프의 배고픈 개처럼 츄릅 혀를 낼름.
그런데,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분명히 네이버 지도를 확인했다. 당연히 문 열거라 생각했다. 다시 한번 보니, '오늘 휴무'라고 쓰여 있었다. 몇 번이나 봤을 때는 눈에 안 들어왔다.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괜한 헛걸음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했다. 짜증 날 법도 한데, 별 말 하지 않았다.
그럼 뭐 할까?
그러면...
돈까스를 먹고 싶다고 해서 돈까스 집을 찾았다. 갔는데 오픈 10분 전이라, 근처에 맛집으로 소문난 빵집에 가서 구경을 하고 빵을 샀다. 다시 돈까스 집에 왔다. 내가 좋아하는 순댓국도 팔았다. 아내는 옛날 돈까스를 먹고, 나는 순댓국을 먹었다. 맛은 중상, 그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양이었다. 냉면 대접에 나오는데, 다른 순댓국집의 1.5배 정도 되는 양이었다. 만족스러웠다.
배부르게 먹고 나와 배를 두드리고 있자니, 입꼬리에 미소가 떠올라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홈플러스 문이 닫아서 오히려 잘 됐다고.
일찍 일어나지 못해서 오히려 좋았다고.
왜냐하면, 일찍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홈플러스 갈 생각을 했고,
홈플러스 문이 안 닫았으니, 빵집에도 가고, 마음에 드는 가게도 하나 뚫었으니까.
늘 가던 길을 가면 아는 길만 가게 된다. 그게 안전하니까.
새로운 길로 가지 않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실패했을 때,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경험. 그 속에서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오늘 아침처럼.
중요한 것은 시도했고, 실패했지만, 그다음으로 나아갔다는 것.
기존의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확장되었을 때, 그 확장 속에서 나는 더 넓어진 나, 새로운 내가 된다.
홈플러스가 닫혔을 때, 세상을 탓하고 실망하고 다시 집으로 가는 선택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 휴무라는 네 글자를 제대로 보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침울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내가 떠밀어준 덕분에) 작은 시도를 했다.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맛집이라는 작은 결과를 낳았다.
뭐라도 해야 하는구나. 작은 깨달음을 준다
특히 지금 나는 회사원이 아니라 무소속이다. 회사원이었을 때는 매일 아침 출근해서 정해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채울 수 있었다. 8시 30분부터 17시 30분까지.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소속이 사라진 지금, 24시간이 다 새롭다. 새롭게 뚫어야 하는 맛집이다. 열었을지 닫았을지 모르는 홈플러스다. 시행착오가 필연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당연히 더 많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느꼈던 이불 킥하고 싶은 감정, 실망하고 우울한 감정, 괜한 패배감, 러닝 하는 아줌마, 아저씨, 티브이에 나오는 잘 나가는 연예인, 어린 나이에 벌써 책을 몇 권이나 낸 작가까지. 하지 않아도 될 걱정과 열등감들로 가득 찰 때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은 그런 시간들일 것이다.
하지만 돈까스 집을 나와서 개구리처럼 부푼 배를 두드릴 때, 동네 맛집 베이커리에서 사 온 단팥빵을 까먹을 때 얼마나 기분 좋던가.
매번 실망하고 우울해하기보다, 오히려 좋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 보기로 한다.
물론, 무소속은 여전히 무섭고, 시간이 지나면 부른 배는 꺼지고, 또 배가 고파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