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그만뒀지만 무소속은 아니다

본가(本家) 파견 근무 종료 보고서

by 순남

회사는 그만뒀지만 무소속은 아니다

벌써 회사를 그만둔 지 3개월이 되었다. 시간이 빨리 갔다.

부자든 가난하든, 똑똑하든, 어리석든 주어진 시간은 똑같다.


그런데 왜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일까?


나쁘게 해석하자면, 생각했던 일들을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려는 일을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좋게 해석하자면, 회사 다니는 3개월보다 노는 3개월이 더 빨리 갔다는 뜻이다.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게 더 즐거웠다는 말일 것이다. 즐거우면 시간이 빨리 간다.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바라면 바랄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 아까워하면 아까워할수록 빨리 간다.


전자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가 더 강하다. 노는 3개월이 더 즐거웠다.

(물론 경제적인 일이 아닐 뿐, 무작정 놀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방어해 봅니다)

제발 빨리 가자 말라고 물 떠놓고 빌고 싶을 만큼, 지금이 좋다.


24시간, 온전히 나의 시간이 되었음을

3개월은 한 분기다. 회사에서 한 분기는 분기 계획을 하고, 실행을 하고, 결과 보고를 하고, 다음 분기 계획을 세우는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업무도 있고, 의욕적인 일도 있지만, 회사라는 거대한 생물의 짜인 시스템 속에서 벌어진다. 시스템 속에서 내 시간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끝났으면 좋겠어. 월급날이 됐으면 좋겠어. 주말이 됐으면 좋겠어. 다음주가 됐으면 좋겠어. 회의가 끝났으면 좋겠어.

내 시간이 소중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이상한 줄 몰랐다. 종종 이상함을 잊기 위해 술잔을 기울였다. 그것대로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떠올려보니, 지금이 훨씬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이면 아내와 산책을 하고,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책을 읽는다.

스마트폰은 한쪽으로 치워둔다. 누구에게 연락 올까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빨리 밥 먹을까. 빨리 운동할까. 빨리 뭘 할까 서두를 일도 없다.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비로소 깨닫는다. 24시간이 오로지 나의 시간이었음을. 내가 선택한 모든 시간들이 다 나의 시간이었음을, 회사 다닐 때도 물론 내 시간이었는데, 잊고 있었다. 내 시간이라는 것을 잊고 있으니까, 중요하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설거지가 좋다

내 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 생활 속의 행동들이 다 감사하다. 특히 설거지가 그렇다. 상당히 즐거운 활동이다. 음식 잔여물을 닦아 내고, 까맣거나 빨갛거나 노란색들을 지워내고, 다시 원래의 그릇 색으로 돌려놓는다. 어렵지 않다. 퐁퐁을 스펀지에 묻혀 쓱 지워내면 된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피사의 탑처럼 쌓여 있더라도, 하나씩 닦고 씻고 덜어내면, 그 높은 탑도 공략할 수 있다. 단순함의 진리를 배운다. 아무리 많고 어려운 문제도 하나씩 해결해서 못할 일이 없다.

살아 내고 있다는 감각을 생생하게 손끝으로 느낄 수 있다. 비포 애프터가 확실하니까, 단 몇 분 만에 진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요새는 그런 생각도 한다. 아내가 설거지 거리를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싱크대 가득 쌓여있는 그릇들을 보면, 게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번 판은 또 얼마나 재밌을까.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릴.... 수도, 변태는 아닙니다만.)


'설거지는 싱크대 물기 청소까지가 설거지다.'

어머니가 전수해 준 설거지 팁을 교훈 삼아, 반작 반작 윤이 나도록 마무리를 하면,

어디선가 아내가 나타나 엉덩이를 두들겨 준다. 칭찬받는 남편은 자존감이 올라간다.


나는 '집'이라는 본사로 복귀했다

생각해 보면, 회사는 그만뒀지만, 소속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카드를 신청하며 배송 주소를 적다가 멈칫했다. 늘 당연하게 적던 회사 주소 대신 집 주소를 쓰면서 깨달았다.


"아, 내 소속은 원래 집이구나."


아니, 오히려 본 소속은 집이고, 회사는 집에서 파견된 협력업체인 셈이다.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간과했다. 난 회사 팀장이기 이전에 이 집의 가장이자, 아내의 남편이었다. 회사라는 소속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저 파견 근무가 끝났을 뿐이다.


본 소속인 집으로 돌아왔으니, 본사 업무에 충실할 때다.

그동안 회사에 신경 쓰느라 집이라는 '본 소속'에 무신경할 때가 많았다. 사실 밖에서 스트레스도 받고, 돈도 벌어오니까 덜 신경 써도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지난날을 반성한다. 파견지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본사에서 인정받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본사'에서 내려준 '설거지'라는 업무로 인정받고 있다. 보상으로 궁둥이 팡팡까지, 너무 감사한 보상이다. 꾸준히 성실하게 이 기세를 이어가서 '우수사원' 아니, '설거지 잘하는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봐야지. (아내의 인정이 백배는 중요하니까. 아닌가. 천배인가.)


그렇게 설거지는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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