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이식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들었다. 그 생각을 듣기 전까지 엄마에게 나나 오빠나 똑같은 자식인 줄 알았다. 엄마가 오빠를 편애한다지만 그건 오빠와 세 살 터울인 큰언니와의 문제로만 생각했다. 오빠의 학업을 위해 자신의 학업은 포기당한 큰언니와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TV에서는 아들이 자신의 간을 아버지에게 주는 뉴스가 나왔다. 엄마랑 나는 ‘어떻게 자식에게 간을 달라고 하냐.’ ‘나라면 그냥 죽는 게 낫다’라며 죽이 맞아 이야기했다. 엄마의 자식이란 생각은 잊고 우리 아이들의 엄마라는 입장으로 말을 이었다.
“진짜 저 아버지가 이해가 안 가. 엄마가 자식 장기를 이식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왜 아버지 얘기는 자주 나오나 몰라.”
내 말에 엄마도 맞장구를 쳤다.
“아들 몸에 어떻게 칼을 대라 하냐.”
그냥 그 정도에서 말을 끝냈어야 했는데 그 날은 무슨 마가 꼈는지 내 궁금증은 가지를 뻗어 나갔다.
“엄마는 우리에게 줄 수 있어?”
엄마는 내 질문에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줄 수 있지.”
“그럼 오빠가 아픈데 내가 딱 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럼 줘야 해?”
엄마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줘야지.”
“그럼 내가 아픈데 오빠가 딱 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럼 주라고 할 거야?”
그렇게 쉽게 답을 내놓던 엄마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장난하듯 내가 엄마에게 대답을 재촉해도 엄마는 침묵을 고집했다.
엄마는 오빠 욕을 우리한테 끊임없이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오빠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막연히 아는 것과 눈앞에서 확인받는 건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오빠가 엄마 집에 올 때 뭘 사 들고 오는 적이 없다. 언니나 내가 엄마 드시라 사둔 것들은 먹고 가끔은 싸 가지고 갈 때도 있다. 경제적으로 풍족해도 틈만 나면 엄마의 돈을 가져가고 돌려주지 않는다. 엄마가 병원 가는 날 오빠에게 부탁하면 겨우 진료만 볼 때 동행하고 돌아가는 길은 아흔의 노인이 혼자 택시를 타게 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아들이 든든하다고 말한다. 오빠는 엄마에게만 철저히 인색하고 냉정하다. 뭐가 그렇게 든든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엄마가 오빠를 사랑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죽어가도 오빠 몸에 칼 대는 건 용납 못 할 만큼 오빠만 귀하다.
엄마의 편애가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기 전에 나와 오빠는 단지 ‘다른 성격의 자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오빠는 1급 자식, 나는 2급 자식이 되었다. 엄마에게 딸과 아들은 똑같은 자식이 아니었다. 엄마가 오빠를 든든하다고 말할 때는 아마도 실질적인 의지가 아니라 가부장제 안에서 엄마를 진짜 ‘어머니’로 인증받게 해주기 때문일 거다. 오빠의 어떤 성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라서 사랑한다는 의미. 그렇다면 엄마는 아들이 아니라 엄마 자신을 편애하는 것인가. 아들을 낳은 진짜 어머니’인 게 너무나 뿌듯할 뿐인가.
엄마가 옛날 사람이라 아들에 대한 편애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엄마의 침묵속 대답으로 차별이 생명의 문제임을 알아버렸으니 이 쓸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내 생명을 덜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아들의 생명이라니 너무 위협적이다.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 생존권 투쟁임을 완전히 이해했다. 차별은 싫은가 좋은가라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라는 생존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