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아무렇지 않던 마음이 하룻밤 새 구름이 몰려들고 뿌연 안개가 끼더니 내내 시야 확보도 안 될 만큼 흐렸다. 시간이 지나도 개일 줄 모르는 마음이 불쑥 소낙비를 뿌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화제를 전환할 요량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셔플 재생으로 아무 노래나 틀었는데, 그 노래로 잠잠하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급작스레 느낀 진동이었다. 마치 말을 걸듯 들려온 노랫말은 숨을 곳을 찾기도 전에 나를 마구 뒤흔들어 무너져 내릴 듯 진동했다.
당최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느닷없이 별의별 일들이 벌어지고는 하는데, 요즘 나의 별 일은 주로 마음에서 일어난다. 호수처럼 잔잔한 고요를 깨고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는데, 그 모양이 꼭 지진과 닮았다. 지진 발생 시 행동요령을 보면 흔들리는 동안은 몸을 낮추고 탁자 아래로 들어가 기둥을 잡고 진동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가만 곱씹어 보니 마음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취해야 할 자세도 비슷한 듯하다. 무작정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먼저 집안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은신할 수 있는 단단한 곳을 기둥 삼아 몸을 낮추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이 어딘가 닮아 있다.
실제 지진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진에 차이는 단 하나. 마음의 지진은 진원지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혹시 모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함인데, 여진은 지진보다 진동은 약하지만 먼저 발생한 지진으로 취약해진 곳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것'에 익숙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는 것에 겁먹지 않고 진동하는 진원지가 어딘지 단번에 짚을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세상 모든 일을 예상할 수 있다면 마음이 크게 요동칠 일도 없을 것이다. 마음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날씨와 같아서, 맑은지 흐린 지 예측을 할 수는 있어도 제대로 맞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겐 잘못이 없다고 했잖아. 나는 좋은 사람이라 했잖아.'
셔플 재생되는 노래 가사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노랫말이 불쑥 내게 말을 걸듯해 이 가사 한 줄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잠잠한 줄 알았던 마음이 자꾸 진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오랜 시간, 나는 나를 유기했다. 나는 나에게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했고 수십 수백 번씩 나를 유기했다. 나 스스로에게 좋은 주인인 척, 괜찮은 사람인 척하며 습관처럼 나를 버려두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래도록 침묵하던 마음이 불쑥 말을 걸어온 그날, 몇 날 며칠 동안 속울음을 울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지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매일 반복되는 여진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잠자코 기다리는 날이 거듭될수록 나는 나에게 미안해졌다.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습관처럼 괜찮다고 했고 내 탓이 아니라고 해놓고 틈만 나면 남들과 다른 나의 탄생을 원망했다. 만일 내게 핸디캡이 없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지금'의 나를 몇 번이고 부정했다. 말로만 괜찮다 하고 습관처럼 외면했던 나를 가만히 돌아보니 그 모양이 유기견과 똑 닮아 있었다. 갖은 감언이설로 나 자신을 속여가면서 내 마음에게 좋은 주인인 양 굴었다.
잠깐이면 된다는 말로 무기한 연기하는 동안 마음이 분실물 같은 삶을 살았다. 언제 되찾으러 올지 모를 나를 찾아서, 군말 없이 버려지던 그날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핑계로 새까맣게 잊어버린 마음이 그제야 속울음을 그치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 듯했다. 별안간 퍼붓는 장대비처럼 쏟아져 쉬이 그칠 울음이 아니었다. 불쑥 찾아온 지진에 한참을 들썩이던 마음을 다독이다가, 내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이것을 믿게 하려고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 사는 동안 수없는 거짓말로 내가 나를 유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여기 서 있으라 말했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이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음 거짓말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여기 서 있으라 말했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이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음 거짓말
談담쟁이캘리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