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캘리 Mar 19. 2021

너의 별이 반짝일 때

EP 1. 이 별의 의미 (발신인을 확인하세요)


  
  까만 밤하늘 위를 수놓은 별들이 유난히 빛나는 날이 있다. 무려 몇 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부터 쉼 없이 내달려, 지금 내 눈에 담긴다는 것 자체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는 날이 있다. 미래완료형으로 닥쳐올 어떤 날을 위로하고자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는 마음처럼, 백 마디 말보다 수 개의 빛으로 반짝인다는 것은 어둔 마음속 불 밝히는 일처럼 그 마저도 든든한 위로일 수 있다. 4년 만의 윤일(閠日), 나에게 걸려온 네 전화가 그랬다.

  
 *


  2월 29일, 있다가도 없는 그 날 우리는 헤어졌다.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 시작은 아름다웠어도 끝은 쭉정이처럼 스러지듯 볼품없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며 호들갑 떨던 우리 관계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초라하게 끝났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설마'하는 마음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길한 촉에도 줄곧 눈을 감았다. 돌려받지 못 할 후한 인심으로 선고한 집행유예는 이별의 순간마다 몇 곱절로 불어, 감히 상상도 못할 형벌로 다가왔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으나 수없이 외면한 진실이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와 헤어진 날짜가 묘한 위로가 될 때도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그 날은 금세 달력에서 자취를 감추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내 대신 시치미 떼 주는 것 같아 그래도 견딜만했다.


"우연이 세 번 겹치면 운명이라던데요."


  아무 연고 없는 우리의 우연이 세 번째 이어지던 날 그가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의 당돌함에 정말 '우연이 세 번 겹치면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나간 소개팅 장소에서 번짓수를 잘못짚어 엉뚱하게 시작된 첫 만남, 외근 길 미팅을 위해 들른 카페에서의 재회, 직장 동료의 결혼식장에서 하객으로 마주친 세 번째 만남까지. 알 수 없이 이어지는 그와의 만남에 묘한 끌림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홀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습관처럼 타던 네 발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별안간 두 발 자전거를 타겠다고 뛰어드는 것. 분명 길들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페달을 밟는 일처럼 '홀딱' 빠져 앞뒤 가늠이 되지 않는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묘령의 대상과 관계를 시작할 때, '가늠할 수 없음'은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베일에 싸인 우리 사이에는 적당한 긴장이 흘렀고, 호기심은 못내 그리운 마음으로 변모해 시시콜콜 서로의 안부와 일상을 묻게 만들었다. 마치 잘 고른 땅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는 일처럼, 양껏 쏟아낸 갖은 물음은 점점 커져 이리저리 가지를 뻗었다.


"한 번 더 만나 지는지 아닌지, 우리 한번 볼래요?"


  계속되는 우연에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나에게 네가 도전하듯 말을 던졌다. 잠잠한 호수에 자갈이라도 던진 건처럼 미묘한 파장이 일었다. 우리는 그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합정역 개찰구 앞에서 상하행선으로 나뉘어 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서 있는 상행선 열차 플랫폼 안으로 열차가 들어섰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노란 선 바깥에 멈춰있던 두 발이 그 경계를 넘으려 할 때, 누군가 내 오른팔을 붙잡았다. 하행선으로 간다며 돌아서 헤어진 그였다. 숨찬 듯 가쁜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나를 보며 안도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이내 당혹감은 사라졌고 어느새 나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다가 숨 고른 그가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 한 잔 할래요?"


반복되던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진 순간은 생각보다 사소했다.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내게 왔을 뿐이었다. 다만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 그 하나로 되돌린 발걸음이었고 덕분에 나는 우리가 어쩌면 진짜 인연일지도 모르겠다는 황홀한 기대에 빠졌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운명은 없고 선택만이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 인연을 개척하려는 그의 태도에서 처음으로 운명을 느꼈다. 함께 마신 찻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그가 말했다.


"이제는 우연 말고 약속하고 만나요, 우리."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언의 눈길만으로도 이미 기류는 달라지고 있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 때문이었을까. 작별인사와 함께 양갈래로 나뉘어 제 갈 길을 가던 때와는 다르게, 나란히 걷는 걸음이 미적거렸다. 지하철역이 가까워질수록 종종걸음으로 걷던 그가 자꾸 제자리걸음을 걸었고, 초조함에 몸의 방향이 자꾸 내 쪽으로 기울어 그와 나의 손등이 몇 번이고 맞닿았다.


"아무 용건 없이 연락해도 되죠?"


그의 물음으로 상행선과 하행선, 결코 닿을 일 없을 것 같던 평행선 같은 일상이 찰나로 포개지는 느낌이었다. 굳이 올려다볼 일 없어 모르고 지나던 밤하늘에 불현듯 반짝이는 별 하나를 발견한 듯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언가가 분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집안의 불을 켜기도 전에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그 핸드폰 불빛으로 스위치를 찾아 불을 밝혔다.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데도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건 없는 대화를 나누는 날들이 하루 이틀 쌓여갔다. 자음과 모음을 이으면 글자가 되고, 별과 별 사이를 이으면 별자리가 되는 것처럼 그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밤 11시만 되면 어두운 방 안에 나를 찾는 너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렇게 매일 밤, 너의 별이 반짝일 때마다 나는 너를 생각했다. 너와의 이별을 감히 상상하지도 않았던 그때, 너는 나에게 확실한 위로였음은 분명했다.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