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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Dec 29. 2020

누구나 외로움을 베개처럼 베고 눕는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족이 있어도
외로운 건 매한가지야.


  대학시절, 학과 연극패 공연 중에 저 대사가 가슴에 박혔다. 어떤 연극이었는지, 누가 나왔는지조차 가물가물한데 저 문장만큼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먼지 쌓인 시절의 문장을 꺼내 와 첫 문장으로 두고 글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입으로 외운 것은 잊어도 마음으로 익힌 외운 문장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 정설인가 보다.

누가 그랬다. 외로움은 어떤 대상과 함께 있을 때 드는 감정이고 고독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것이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의하는 것을 보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외로움을 베개처럼 베고 누워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릴 때만 해도 혼자는 당연히 외롭고 둘은 마땅히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는 당연한 것도 마땅한 것도 없었다. 하물며 억겁의 낮과 밤을 지나는 자연 풍경마저도 꾸준히 제 몫을 다할 뿐. 일정한 궤를 지켜 흐르는 모양을 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착각은 자유라 제동을 걸기 전까지 수없이 가속페달을 밟는다. 그중 가장 무심히 밟았던 페달이 '가족'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 더는 외로울 일이 없을 거라는 착각. 그리고 산달이 오기까지 열 달 내리 태아를 품은 산모는 모두 자연히 모성이 샘솟을 거라는 착각. 대개 모든 착각이 그러하듯 산산조각이 나고 나서야 바로 보는 눈이 생기는데,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도 '둘이여도 외로운 건 똑같다'라고 했다. 결혼은 외로움을 졸업하는 일이 아니라 때마다 다르게 찾아오는 외로움의 시차를 상대에게 기대어 위안받는 일인 것 같다면서, 혼자일 때 외로움의 감정을 다독일 수 있을 때 결혼해야 불현듯 찾아드는 외로움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또 어느 날 나에게 설레는 목소리로 '곧 엄마가 된다'며 임신 소식을 전하던 친구는 출산 후 울적한 목소리로 말 못 할 고민이 있다며 제 속을 터놓았다.



이상해, 내가 열 달을
품었다가 낳았는데 낯설어.



  출산 예정일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막상 아기를 낳고 난 자기 마음이 엄마의 마음 같지 않다며 모성애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분명 제 속으로 낳았는데 자신을 별로 안 닮은 것, 조막만 한 녀석의 눈코 입이 자기만 좇는 모습이 영 낯설고 어색하다며 스스로를 이상해 했다. 친구의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아 친정 엄마에게 들켰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안는 중에 데면데면한 것을 보고 '너는 네 속으로 낳은 아기가 예쁘지 않니'라고 물었단다. 친구는 들킨 마음을 터놓으며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자책할 때 친정 엄마가 해 준 말을 내게 전했다.



정 들여야지, 가만히 보면
아기도 저들만의 언어가 있어.


기껏해야 '울음'이 의사소통이 전부인 아기에게도 저들만의 언어가 있단다. 친구 말을 듣고 보니 세상에 힘 들이지 않고 저절로 얻어지는 마땅하거나 당연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마주 보고 대화도 나누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서 절로 가족이 될 리 만무했다. 세상에 어떤 가족도 거저 만들어지는 일은 없고 절로 단단해지는 울타리도 없었다.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사람을 엄마라고 생각해 졸졸 따르는 닭이나 오리처럼 사람도 절로 '가족애'가 생기는 줄 알았다. 허나 그것은 각자의 언어로 생각을 나눌 일 없는 야생 동물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동물과 달리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소통하며 정 들이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물며 가족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하릴없이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관계의 숙명이었다.







  돌아보니 내게는 '아빠의 언어'가 그랬다. 그는 무뚝뚝하고 투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탓에 말없음이 긍정이었고, 이따금 '응'이나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전하는 단답형의 언어가 표현의 전부였다. 나중에야 술만 마시면 으레 사 들고 오는 빵이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내게도 아빠가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중에 나를 오랜 시험에 들게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관계없어'라는 말이었다.


아빠는 습관처럼 외마디 말만 반복했다. 말수가 적어 꼭 필요한 말이 아니고는 좀처럼 입을 떼는 일이 없어서였을까. 그 말은 꺼낼 때마다 더는 상관하지 말라며 경계선을 긋는 것 같았다. 행여 이야기를 주고받을라 치면, '관계없어'라는 말 한마디 툭 던져두고 우걱우걱 밥을 먹었다. 사춘기 무렵에는 아빠의 과묵함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아빠는 대체 뭐가 맨날 관계없다고 하는 건지. 서운함 가득 찬 물음을 던졌다가, 그간 오해했던 말의 행간을 읽었다.



관계없어, 아빠는 너를 위해서라면
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는 한껏 투박해진 말투로 힘주어 말했다. 도리어 억양은 세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아빠의 과묵한 언어를 이해했다. 듣고 싶지 않다는 거절이 아닌, 무엇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잘 알지도 못 하면서 홀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대화하는 내내 홀로 외로움을 떠안았다.

문득 우리 모두는 외로우니까 사람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불현듯 맞닥뜨리는 어떤 외로움은 상대의 언어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하고 오해한 채 섣불리 들어가 버린 '외딴 방'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나처럼 가족이므로 마땅히, 당연히 알 거라고 착각한 마음이 자꾸 가속페달을 밟아 더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주말, 케이블에서 오랜만에 <러브 액츄얼리>를 다시 보게 되었다. 2007년, 내게 처음 이 작품을 소개해 준 누군가는 영화 속 옴니버스 형식의 사랑이야기 중에 제이미와 오렐리아의 사랑이야기가 가장 좋다고 했다.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국적이 다른 영국 남자와 포르투갈 여자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벌써 몇 번을 반복해 본 영화였는데도, 그때는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일이라는 것과 상대의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 힘 들이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관계의 힘'은 사랑이 아니라, 지속적인 '힘들임' 속에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제이미가 오렐리아에게 청혼할 때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오렐리아.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결혼해 줄래요? 서로 잘 알지도 못 하는데 이런 말 하는 건 우스울지 모르지만. 때로는 어떤 이유나 증명이 없어도 확신이 드는 때가 있죠."

"But sometimes things are so  transparency, they don't need evidential proof."



오렐리아를 향해 청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의 언어를 익히는 자세가 바로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언어를 더 잘 듣기 위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히고, 상대의 시선에서 보기 위해 몸을 낮추는 것.  곁에 있는 이들에게 소리 내어 사랑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관계의 특권이 아닐까.


비록 누구나 외로움을 베고 누워 잠들고 어느 시인이 쓴 시 구절처럼 '하느님도 외로워서 가끔 눈물을 흘리신다'는 삶이지만 그래도 살아있으므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위로받으며 하루 끝은 부족함 없이 닫기를 바라본다.






무인등

/ 담쟁이캘리




밤낮없이 불 밝히고
우두커니 서 있는 등 하나


달도 숨은 저 어둔 밤
덩그러니 서 있는 등 하나


홀로 걷는 길 모퉁이
꺾어지는 찰나, 나의 위로


어둔 낯도 등에 기대어
기나긴 하루 무사히 닫기를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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