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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an 19. 2022

인생도 시즌오프가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데, 벌써 곳곳에서 시즌 오프 세일로 이른 봄맞이 준비에 분주하다. 나 역시 세일 버프를 누리려 평소 눈여겨보던 쇼핑몰을 기웃거렸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다시금 확실해진 것이 있다면 내가 가진 물건 중에 옷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고, 무언가 허한 마음이 들 때면 공연히 찜해두었던 옷을 장바구니에 담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바구니에 무언가를 담는다고 마음이 두둑해지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어도 마음이 시리고 추위를 이기려 껴입은 옷마저 거추장스럽다 느낄 때쯤 인생에도 시즌 오프가 있었으면 싶었다. 절기 따라 구분이 명확한 계절처럼 때 되면 알아서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그간 나의 근황은 온통 회사에 있었다. 온종일 일로 시작해 일로 마무리 짓기를 반복하면서부터 취미생활마저 힘에 부쳤다. 글을 쓰기에는 몸이 고단했고 그 좋아하던 밤하늘의 달을 감상할 여유는 꿈꿀 수도 없이 피로가 쌓였다. 제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눈만 감으면 지속되는 악몽에 지쳐갔다. 밤마다 습관처럼 편도가 부었고 몸을 뉘여도 경직된 근육은 좀처럼 풀릴 줄 모르고 점점 더 딱딱해졌다.



딱딱해진 것은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복이라고 믿었던 믿음에 금이 갔고 스스로가 무능하게 보였다. 반드시 이름 난 작가가 될 거라던 장래희망은 이룰 수 있기는 한 건지 먼 미래에 처박힌 듯했고, 급작스러운 직무 순환으로 영업지원 파트를 맡아 일 년째 손익분석 업무를 보면서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마케터로 입사했건만 도리어 혹처럼 붙은 업무가 메인이 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했다. ‘회사는 자아실현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을 염불처럼 외며 출근해서는 좌뇌를  쓰고 퇴근해서는 글쓰기로 우뇌를 쓰니 뇌를 골고루 활용할 수 있는 기회라며 긍정의 힘으로 버티던 중이었다.



  크든 작든 무언가를 지속하는 힘이 길을 낼 거라고 믿었다. 출퇴근 시간을 쪼개가며 틈틈이 글을 썼고 그 꾸준함으로 엮은 브런치 북이 덜컥 당선될 수도 있다고 자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이어 고배를 마시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허탈한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회사 일에 바빠졌고 사업계획 시즌만 지나면 괜찮다는 상사의 말은 물거품이 되어, 여전히 업무에 쫓기는 중이다. 게다가 작년 6월부터 생긴 결원은 반년이 넘도록 공석이라, 홀로 두 사람 이상의 업무를 쳐내며 종종 한계에 부딪친다. 업무를 보는 데 가장 큰 고충은 아무리 애써도 본전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도와줘야 할 업무는 산더미인데 정작 내가 바쁠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업무 구분도 없이 무턱대고 나부터 찾고 보는 탓에 마치 '고충처리 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가 된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모든 업무를 쳐내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당연하게 채근하는 사람들을 겪으며 애쓴다고 결과가 다 좋은 것은 아님을 알았다.



  연말 느낌도 없이 어영부영 새해맞이를 하면서 애쓰지 않고 얻은 것이라고는 나이뿐인 듯했다. 그래서일까. 간절히도 인생에 시즌 오프가 있었으면 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도 알고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차피 세상은 알쏭달쏭하고 묘한 요지경이니까. 제값대로 지불하고 그 대가로 주고받는 등가교환 인생 말고 시즌 오프 세일가로 득템 하는 하루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어디 세상 일이 뜻대로 되나. 제발, 하며 바라던 마음이 민망할 만큼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어제보다 퇴근시간이 더 늦었다는 것밖에. 잠시나마 이루지도 못할 꿈을 야무지게 꿨다 싶었다.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으니 원 없이 잠 좀 잤으면 했다. 하필 배꼽시계가 눈치 없이 요란하게 울지만 않았다면 곧장 집에 가 질펀하게 쓰러질 날이었다. 무언가 씹어 넘길 힘조차 없어 후루룩 면치기나 할 요량으로 집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대강 걸터앉아 짬뽕을 시키고 보니 혼자 앉은 건 나뿐이었다. 평소 혼밥을 즐기지 않지만 허기만 채우고 일어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때였다. 자리로 다가온 점원이 시키지도 않은 음식을 올려두고 홀연히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저 이거 안 시켰는데요?"



잘못된 것을 빠르게 돌려놓을 생각으로 그릇을 내려놓기 무섭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순간 내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날 선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으나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요즘 내 일상이 딱 틀린 그림 찾기의 연속 같았다. 사업계획 자료를 검토하면서 틀린 숫자를 수정하고, 연간 손익분석 자료를 만들고…. 잘못된 부분을 찾아 고치는 일에 이골이 났다고 해야 할까. 퇴근해서도 일의 연속인가 싶을 때쯤, 점원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군만두는 서비스예요, 맛있게 드세요."



  왜지? 무슨 이벤트 같은 건가?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군만두가 놓인 테이블은 내 자리가 유일했다. 믿기지 않아 영수증을 확인하니 정말 ‘서비스 군만두’라고 적혀 있었다. 종종 이곳을 찾기는 해도 단골이라 불릴 정도는 아닌데, 한눈에 봐도 갓 튀긴듯한 먹음직스러운 군만두를 거저 받으려니 짜증을 낸 것이 머쓱해졌다.





대강 걸터앉았던 자세부터 고쳤다. 이유를 불문하고 내 눈앞에 놓인 군만두가 너무 고마워 일순간 끼니를 대충 때우고 일어나려던 마음도 사라졌다. ‘나에게 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하니 몇 점 먹다 남기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왜 하필 나인지 의아한 마음과 다르게 금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렴 어떠랴. 그저 내 앞에 놓인 음식을 행복하게 즐기고 잘 소화시키고 나서 덕분에 잘 먹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충분할 일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싶다가도, '별 일이 다 있다'라고 중얼대다가 이것도 별일은 별일이다 싶었다. 나에게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그토록 바라던 ‘시즌오프 세일처럼 득템 한 하루’가 오늘 같은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사소한 것 하나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확실히 행복해졌으니.   





  제값을 주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순식간에 눈앞에 놓여 있었다. 내내 한겨울처럼 딱딱했던 마음이 찰나에 누그러졌다. 고작 군만두 한 그릇에 마음이 이렇게 변하다니. 아직 아침저녁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 몸과 마음이 딱딱하게 얼어붙기는 쉬워도 마음의 녹는점은 생각보다 사소한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록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인생이라도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살면서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이 사소한 순간들 속에 내재된 온기가 상당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에 공짜가 없고 대가 없는 행복은 없다지만 가끔은 철옹성 같은 세상 이치를 깨고 변수가 생기기도 하니까. 오늘처럼 내 손에 쥔 것을 내주지 않아도 두둑이 배불릴 수 있는 날도 있고, 또 예기치 못한 변수로 값 비싸게 불어난 불행이 시즌오프처럼 하한가를 치고 행복이 상한가를 치기도 하는 알쏭달쏭한 세상이므로.



좀처럼 풀어질 줄 모르는 딱딱한 마음이라도 이 시기만 잘 버티고 나면 어느새 인생에도 봄이 가까워 오지 않을까. 번듯하게 꿈꾸는 미래도 툭하면 발목 잡는 과거도 모두 '여기'를 벗어난 현실 궤도 밖의 것이니 눈앞의 현실이 어떻든지 오랜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또 다른 오늘을 향해 즐거이 발걸음을 떼며 다짐해 본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숨쉬는 곳
여기서 행복하자고.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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