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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Aug 05. 2022

답도 없는 이야기

미성년자도 성인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

  


  받아쓰기조차 큰 시험 같았던 시절, 어린 내 눈에 유독 멋져 보였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빨간 펜. 정확히는 답을 채점할 때 쓰는 종이 말이식 색연필이었다. 지웠다 썼다 반복하며 겨우 써낸 답안지를 보고 동그라미든 빗금이든 거침없이 긋는 어른들을 보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머릿속에 정답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학습지 선생님을 만나면서였다. 그는 수업 말미에 항상 학습문제를  풀어보게 하고 가방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내 바로 채점을 하고는 했는데, 매번 해답지를 보지 않고 채점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답지를 보지 않고 모든 답을 아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문제만 봐도 답이 보여.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거야."

 


  나이가 들면 답이 보인다니! 과연 어른들의 눈은 어떻게 다른지 얼른 경험하고 싶어졌. 오답을 벗어나지 못해 빗금 투성이었던 나로서는 나이 먹는 일에 환상을 갖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만 봤다 하면 빗금 투성이라 빨간 동그라미를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학습지를 하고 싶다고 조른 게  된 이유도 광고 속에 등장하는 동그라미를 보고 나서였다.



  광고는 한 아이가 운동장 한가운데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는 내용이었는데, 화면 속 꽉 찬 동그라미를 볼 때마다 채점지 속 빨간 동그라미가 떠올랐다. 만일 이 학습지로 공부한다면 모든 시험지를 동그라미로 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함께 흘러나왔던 CM송도 한몫했다.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라는 노랫말을 들으며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시험지 속 동그라미가 넘쳐날 거라고 믿었고 이 학습지를 선택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줄 알았다.



  하물며 어른이 되면 문제만 봐도 답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 오죽하랴. 모든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고 앞으로 다가올 어른의 나이를 동경하게 됐다. 무얼 하든지 어른의 허락을 받거나 도움을 받아하는 이유가 어른을 모든 문제의 답을 알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자기 일을 알아서 척 스스로 해내는 어른들을 보면서 나이가 들면 머릿속에 정답이 마법처럼 떠오르는 거라고 확신했다.  




  답이 보이는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건 순전히 수학시험 때문이었다. 사칙연산 문제만 나오면 다 틀리는 탓에 '와르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시험지 속 모든 문제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게 되어 있는데 왜 계산할 때는 그 순서를 무시하고 곱하기와 나누기를 먼저 하고 더하기, 빼기를 나중에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새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왜 그렇게 계산해하는지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은 '그게 규칙이다'라는 말뿐이었다. 원래 그렇다는 말로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너무 부족했다. 모든 것이 알쏭달쏭하고 묘하게만 보이던 와중에 듣게 된, 어른이 되면 답이 보인다는 이야기는 풀지 못했던 문제의 답을 드디어 찾은 듯 반갑기 그지없었다. 어른이 되면 머릿속 의문은 사라지고 모든 문제의 답이 마법처럼 떠오를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성년의 날'을 인생의 분기점 삼아 고대했다. 양손 꼬박 다 접고 다시 펴기를 반복해야 셀 수 있는 만 스물의 나이에 미성년자를 벗어날 수 있다사실만으로 이미 그 숫자는 마법처럼 느껴졌다. 




  애석하게도 스물을 지나고 서른을 넘겨도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 투성이었다. 뒤늦게 학습지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는 '일정 나이가 되면 암산이 가능하다.'뜻임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른이 되었을 때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에 대하여 마음껏 상상했다. 모든 답을 아는 어른이 된다면 지금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돼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같은 것.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기대는 쉽사리 접지 못했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2로 바뀌면서 더해지는 책임의 무게가 무거워 스스로 '어른의 시기'를 유예하며 여전한 어린아이처럼 굴기도 했다. 스물에는 만 나이는 아직 십 대라는 위안으로 만 나이 스물이 되어서는 갓 성년이 되었다는 핑계로 직면한 문제로부터 도망쳤다.



동심에서 출발해 동화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현실에서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같은 결말은 없었다. 문제 하나를 넘기면 또 다른 문제가 닥쳐 방심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시험의 연속이었다. 스물을 기점으로 누구의 허락 없이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스스로 답을 채워야 하는 수많은 문제 앞에서 답을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른이 되었지만 답을 알 수 없어 알쏭달쏭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은 답안지를 채울 수 없는 이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것. 어릴 때는 답안을 쓰지 못하고 빈칸으로 낸 이유는 단 하나, 문제의 답을 몰라서였다. 한데, 막상 어른이 되어 보니 답을 아는 문제를 만나더라도 여건이 안 되거나 내키지 않아서, 혹은 선택지가 여러 개라 쉽사리 빈칸을 채울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마법의 숫자처럼 느껴졌던 스물은 아무런 효험이 없었고 나이를 먹는다고 모든 문제의 답을 깨치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과서 속 문제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유형의 문제들이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그래서일까.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를 대할 때면 꼭 수학시험 보는 꿈을 꾸고는 했다. 꿈속에서 나는 시험지를 받자마자 알고 있는 모든 공식들을 적느라 바빴다. 시험지가 공식으로 빼곡하게 찰 때쯤 문제를 풀기 시작했는데, 수십 가지 공식을 적어두고도 결국 문제에 어떤 공식도 대입하지 못하고 끙끙대다 시간 초과로 백지를 내기를 반복했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이 같은 꿈을 꾸는 것을 으레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 생각해 긴장을 푸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이 반복되는 꿈속에도 분명한 은유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근차근 꿈속 장면을 복기하다가 세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꿈에서는 시험지를 채점하는 사람이 없었다. 둘째, 꿈속에서는 답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과 시간 초과를 알리는 종소리만 들렸을 뿐 채근하는 사람은 보이지 없았다. 셋째, 시험지에 갖가지 공식을 적고도 그 어떤 문항도 공식을 대입해 풀지 못했다.



  꿈속에 담긴 의미를 찾기 위해 고민한 끝에 이렇게 결론지었다. 꿈속에 채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마도 인생의 문제들은 정해진 공식도 정답도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 오매불망받고 싶어 한 동그라미는 수학 문제처럼 답이 정해진 문제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스스로 고민해서 풀어 나가야 할 인생의 문제들은 정해진 답도 공식도 없으니 어느 누구도 내 답안지에 빗금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스물네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 어떤 결정도 늦고 빠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 물론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그 결정을 해야 할 기한은 주어지겠지만 답을 써내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므로 채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은 공식이 없다. 똑같은 문제를 만나더라도 각자가 도출해내는 답이 다를 수 있다. 아무도 점수를 매길 수 없고 그러니 당연히 오답도 정답도 없다. 결국 인생은 살면서 접하는 모든 문제의 답을 내고 수정하며 스스로 써낸 답을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동그라미를 받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던 것이 얼마나 어리숙한 마음인지 깨달았다. 답이 보이는 어른이 되기를 꿈꿀 것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 끝에 써낸 나만의 답을 그 누구도 채점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지켜낼 힘 있는 어른이 되기를 꿈꿔야 했다. 설사 스스로 써낸 답을 멋대로 평가하고 점수 매기는 사람들 때문에 흔들리게 되더라도 꺾이지 않고 꾸준히 자기의 일을 하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순서였다.



  어차피 인생은 답 없는 이야기다. 더욱이 스스로 내린 답 또한 시간 흐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과거에 내가 내린 그 답이 최선이었어도 훗날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때는 이전과 다른 답을 내릴 거라고 할 때가 있듯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어른이 되면 문제만 보고 답이 무엇인지 암산이 가능할 때도 있겠지만 그 셈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듯이. 인생은 학교 시험과 다르게  언제든지 이의제기 신청이 가능하고 각자가 내린 정답을 토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복수 정답도 인정이 된다. 모든 인생의 답은 나에게 있고 그 답안지에 점수를 주는 것 역시 나의 몫이었다.



고로 동그라미를 받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줘야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인생의 문제를 풀며 살아가는 중이각자적어낸 답에 대하여 스스로 확신을 주고 동그라미를 그려줘야 할 일이었다. 인생 자체가 답도 없는 이야기지만 모두가 자신만의 답을 도출해내고 그것을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으므로. 혹 스스로 써낸 답이 오답처럼 느껴져도 동그라미 주는 일을 멈추지 않으련다. 어떤 답이든 그 답을 적어내기까지 고민하느라 쏟은 시간과 노력은 틀리지 않았으므로.



  끝없이 틀리고 흔들리기를 반복할지라도 살면서 마주한 모든 문제에 치열하게 고민했다면 나에게 변함없이 빨간색 동그라미를 주는 사람으로 제 자리를 지키련다. 나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아군이니까.







느낌

/ 담쟁이캘리




느낌은
말없는 마음이
찰나에 그려내는 장면일지 몰라

 
그 어떤 서사도
얼개도 없이 그저, 속 안에 
잠자코 있던 마음이 진동하고
이제껏 점잔 떨던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소음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 짧은 순간에
말없는 마음이 그려내는 장면일지 몰라

 
말도 안 돼, 이상하지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느낌인데 
보통 우리는 마음을 따라가더라

 
소리 없는 마음이
찰나에 그려내는 명장면은
한 편의 영화 같은 첫 씬이자
되감아 볼 수 없는 씬이야

 
결말이 아쉬울 순 있어도
마음대로 떠난 걸음에는 후회가 없지


찰나의 순간,
강렬한 느낌으로
마음이 그려내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내 생애 명장면이거든

 

* 씬(scene): (특정한 일이 벌어지는) 장면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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