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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Jun 01. 2022

신발은 솔직하다

감추지 않는 존재의 무거움



  내 신발의 유효기간은 반년이다.



신발이 신발로서의 효력을 다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뇌성마비를 앓는다는 것은 평생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일이었다. 그중 샌들이나 구두는 밑창이 얇아 일주일 만에 운명을 다하기도 했다. 어릴 때는 한 달도 못 가 신발을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니 반년이면 유효기간이 꽤 길어진 셈이다. 사는 동안 짧으면 일주일, 길면 반년 동안 신발을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제 값을 치른다고 해서 모두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쳤다.



그래도 짱짱하던 것들이 변해 낡고 지는 모습을 보는 일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가끔은 새 신발을 장만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모두가 나와 비슷한 주기로 신발을 버리는 줄 알았다. 얼마 못 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신발이 서러워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으로 슬픔을 잊었다. 나중에서야 다른 아이들은 수개의 신발을 사두고 옷차림에 따라 바꿔 신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두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날은 온종일 궂은비가 내렸다. 등굣길 비 소식이 있으니 우산 챙겨가라던 엄마 말을 흘려듣고 마른하늘만 믿고 빈손으로 나섰던 날이었다. 체육시간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모이기 무섭게 날벼락같은 폭우가 쏟아졌다. 곧장 교실로 들어와 실내화로 갈아 신었지만, 오른쪽 신발 밑창에 난 구멍 탓에 점박이처럼 한쪽 발만 흙탕물에 젖었다. 하필이면 흰 양말을 신어 꼴이 더 우습게 됐다. 그만 버려야지, 하면서도 아끼던 신발이라는 이유로 그냥 신고 나온 것이  잘못이었다.



  평소 나를 미운 오리 새끼 보듯 하던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는 없는 듯했다. 일제히 내 주위로 몰려들었고 뽀송뽀송한 수개의 발이 나의 얼룩진 발을 꼭짓점 삼아 빙 둘러섰다. 개중 한 아이가 내 손에 든 신발주머니를 빼앗아 안에 있던 신발을 내던지듯 바닥에 굴렸다. 이내 너덜너덜한 오른쪽 신발 밑창이 고스란히 바닥에 전시됐다.



  나는 예기치 않게 배를 보인 강아지처럼 온몸이 굳었고 꼬리 내리듯 고개를 푹 숙였다. 비 때문인지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언뜻 적장의 허를 찔러 승리를 쟁취해 낸  환호성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겨룬 적도 없는데 마치 참패한 것 같은 기분에 잔뜩 풀이 죽었다.





  그날 이후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뽀송한 발을 가진 아이들이 부러워졌다. 또다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를 쓰고 신발 밑창을 감췄다. 그러면 우글쭈글한 마음이 곧 짱짱해질 줄 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추면 감출수록 마음이 반반해지기는커녕 볼품없이 울기 일쑤였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우기가 이어지는 것처럼 오래도록 축축한 기운이 들어 마음이 곧잘 주름졌다.





  "그 시절 내 자존감은 반쯤 접혀 있었던 것 같아."


  얼마 전 만난, 곧 결혼을 앞둔 친구가 내게 청첩장을 건네며 말했다. 대학시절 자신은 정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강의실까지 가는 동안 매일 평균 열 명이 넘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것 같다고. 그만큼 친구가 많았다는 뜻이 아니라 혼자라는 게 무서워서, 깊숙한 내면의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서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도 아는 체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외로움을 감추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 곁에 있는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것을 아마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라며 말을 이었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이제는 자신의 부족함이 무엇이고 문제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도 했다. 친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이고 약점을 인정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자존감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친구와 약속이 있던 그날, 어릴 적 그날처럼 밑창이 해진 신발을 신고 밖을 나섰다. 밑창이 닳기는 했지만, 비 예보가 없었고 입고 나온 옷과 잘 어울리는 신발로 이만한 게 없다 싶어 그냥 신고 나왔다. 친구를 만나는 동안 나의 해진 신발 밑창을 들출 일도, 신발 밑을 궁금해하는 일도 없어서 그때처럼 들키지 않고 무사 귀가했다. 시간이 약이 된 건지 더 이상 어릴 때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애써 감추려는 마음도 사라졌다. 반년 만에 신발이 해지고 신발이 신발로서 효력을 다하는 것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그날 약속 장소에 신고 나간 신발이 조금 해지기는 했어도 아직 신을 만 해 버리지 않고 신발장에 넣어두었다.   



  그날 친구와는 그 이야기 외에도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답잖은 농담을 더 나누다 헤어졌는데, 이상하게 친구가 건넨 저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친구가 건넨 그 말이 처음에는 토씨 하나까지 선명히 떠오르다가,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어렴풋해지고 알맹이만 남았다. 그렇게 자연히 잊힐 줄 알았는데 불현듯 어릴 적 약점을 기를 쓰고 감추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때의 내가 스스로옭아매고 있었다 사실과 내 마음이 우글쭈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감출 수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 엄한 데 힘을 쏟고 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힘이 있다. 스스로 그 힘을 분배해서 어느 부분에 힘을 들이고 뺄 것인지. 저마다의 규칙을 세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한다. 이때 효율이란 스스로 엄한 곳에 에너지를 쓰느라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방어기제로 하게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결국 스스로에게 주어진 힘과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 쓰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물이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온통 자신을 감추고 숨기는 일에 몽땅 할애했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정하기 급급했다. 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았고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이 그러하듯 타고난 몸의 모양도 쉬이 바뀌지 않는 것인데, 변하지 않는 것에 갖은 힘을 모두 쏟으며 살았다. 그러니 여태껏 살아온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저 신발 밑창 좀 보라고, 금세 낡고 헤져 지저분한 저 꼴이 우습다고 말할 때. 신발 밑창을 감췄고 낡고 해진 신발과 함께 자존감까지 같이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 자존감은 함부로 버리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애써 감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주눅 들 것도 없었다. 나도 내 친구처럼, 감추는 것 없이 스스로를 마주할 용기만 내면 될 일이었다. 스스로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일에 하루빨리 용기를 내지 못해서, 괜히 주어진 시간을 형벌처럼 살았음알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금세 닳아 해진 신발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내 신발은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내 신발은 아닌 체하지 않고 남들보다 더 솔직하게 걸어온 길에 대한 흔적을 남긴다. 흙길을 걸으면 발등에 흙먼지가 쌓이고 모래사장을 걸으면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든다. 비 오는 날이면 발등이 축축하게 젖고 오래 걸으면 걷는 대로 밑창과 뒷굽이 닳아, 스스로 걸어온 길과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동안 내 신발이 솔직한 것인 줄도 모르고 애써 감추며 사느라 고단했을 지난 시절의 나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내 신발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게 아니라 솔직한 거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덤빌 수 있는 짱짱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했는데. 감추는 것 하나 없이 솔직한, 신발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 참 오래도록 마음을 우글쭈글한 채로 방치했다.    



  어릴 때는 감추는 것이 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친구가 내 앞에서 묻지도 않은 자신의 부족함과 약점을 꺼내놓았을 때. 그 순간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강인해 보였다. 솔직하게 터놓은 그 약점이 그의 인생 전체를 흔들 만큼 큰 것도 아니었고, 그까짓 것으로 고꾸라질 만큼 지나온 삶의 토대가 빈약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터놓을 수 있었던 그 용기가 친구의 남은 인생을 굳건하게 한 듯했다. 비단 그 친구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좀 더 일찍 용기를 냈다면 당연히 그랬을 일이었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솔직해질 용기를 낸 순간부터 마음은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감추지 않는 존재들은 모두 묵직하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가 그것을 놀림거리로 삼는다고 해도 쉬이 흔들리지 않고 그것이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들추는 것은 그저 자기 얼굴을 비추는 거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익숙한 내 얼굴을 거울로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듯이, 스스로 어떤 약점이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볼 줄 아는 용기가 있는 이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다.



  내 신발의 최대 유효기간은 반년이다. 이번에 친구를 만날 때 신고 나간 신발은 얼마 못 가 쓰레기통에 버려질 운명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도 여전히 반년이 지나면 더 신고 싶어도 신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사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신발을 쓰레기 통에 버리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저 남들보다 빨리 신발이 닳는 것뿐 누구나 신발은 닳고 버려야 할 순간이 온다. 물론 가끔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예상보다 더 처참한 상태로 버려져  마음이 삐끗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신발을 버리고 새 신발을 살 때가 되면 이런 기대를 품을 듯하다.





이 신발과 헤어지고 만나게 될
새 신발은 과연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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