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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May 14. 2022

왼손잡이 아빠

미처 보지 못했던 손에 대하여



  "너도 왼손잡이구나, 나도 왼손잡이야."



  먼 나라 이야기 혹은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생각한 '결혼'이라는 단어가 일상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부모님께 짝꿍을 소개하는 식사 자리에서 아빠가 반색하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짝꿍을 보다가 발견한 공통분모가 반가웠는지, 자신도 글씨를 쓰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힘을 쓸 때는 왼손을 쓴다고 했다. 작은 공통점 하나로 이야기 꽃을 피우던 아빠는 괜히 긴장돼 잘 먹는 술마저 안 받는가 싶더니 이제야 속이 풀린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왼손잡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부모님과 부쩍 가까워진 모습에 마음이 마냥 흐뭇하던 것도 잠시, 여태껏 살면서 아빠가 왼손잡이였는지 몰랐던 나에게 당혹감이 들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미처 몰랐던 사실멋쩍기도 했다. 아무 내색 않고 무탈하게 식사를 마쳤지만, 꼭 제값을 주지 못하고 외상이라도 달아두고 온 것처럼 종종 마음이 그날 그 자리로 되돌아갔다.          






  아빠는 내 생애 첫 자취를 두고 '독립기념일'이라고 칭했다. 혼자 힘으로 독립해서 자기만의 공간을 꾸리고 그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이니 맞는 말 아니냐고. 그 작은 것이 눈 깜짝할 새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며 독립을 기념했는데 그것이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한 해가 지나는 동안 자취방에 여러 번 아빠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녀갔다. 주로 내가 출근하고 없을 때 오갔는데, 그때마다 냉장고 속 반찬 가짓수가 불어 있었다.



엄마가 새로운 반찬을 하거나 집에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마다 습관처럼 나를 떠올려 가져다줘야겠다며 챙기는 것이 엄마보다 더하다는 후문을 듣고 구태여 무엇을 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이 끊이지 않는 것은 살뜰한 보살핌 덕분이라는 것 알았다. 식구가 함께 때는 너무 익숙해 자잘하게만 느꼈는데, 혼자가 되고 나니 당연시되던 일상이 불현듯 새삼스러웠다.



  나를 떠올리며 반찬통에 꾹꾹 눌러 담았을 엄마의 보이지 않는 손과 그것을 가방에 옮기며 더 가져다줄 것이 없는지 살폈을 아빠의 분주한 손이 절로 그려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채운 냉장고는 나를 향한 관심과 사랑의 은유로 읽혔다. 가끔은 요기를 하지 않을 때에도 냉장고를 열어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포만감이 들기도 했다.





  독립은 했지만 엄마 아빠의 마음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그 마음을 헤아리다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삶을 오늘 이 자리로 이끌었음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무심한 철부지로 썰물처럼 흘려보낸 지난 시간이 물밀듯 올라왔다. 그동안 당연하게 누렸던 지난날들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듯했다. 슬플 때나 괴로울 때마다 잠시 휘청이기는 했어도  스스로 털고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많은 마저 자세히 보니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등 뒤를 쫓으며 부단히 지탱하있었다.  



제 아무리 열심히 보답하려 해도 조건 없이 쏟는 사랑에 비할 수 없었다. 내 생각과 키를 훌쩍 뛰어넘는 심해와 같은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리기 어려웠다. 가없는 사랑이 밀물처럼 올 때는 썰물로 달아나기 바빴다. 밑을 드러내고 개흙같이 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뒤늦게 마음을 깨닫는 모양을 보부모 자식 간에도 조석간만의 차가 있는 듯했다.



  사는 동안 셀 수 없이 흔들리면서도 물 먹지 않고 파도 결 따라 타고 노니는 마음일 수 있었던 것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살뜰히 돌봐준 덕분이었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수십수백수천 번 반복된 물음에 지침이 없는 것은 그 안에 꽉 찬 진심 때문이었고 그 속뜻을 몰라 매번 똑같은 물음에 괜한 짜증을 낸 것은 나의 어리숙함이었다.





  그제야 왜 자꾸 마음이 그날의 식사자리로 돌아갔는지 알았다. 단순히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밥을 먹는 아빠가 왼손도 쓴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 다 컸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에 대한 당혹감이었고, 가족으로 지내면서도 아빠가 왼손잡이인 줄 몰랐듯이 아직도 미처 보못하고 무심코 지나쳤을 수많은 순간 있을 거라는 사실에서 느낀 부끄러움이었다.



  식사시간마다 식탁 위에 세트로 놓이던 수저 네 벌 중 하나를 들고 나와 자취방을 꾸렸을 때, 홀로 밥을 차리며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나의 첫 자취를 기념해 '독립 기념일'이라 칭하며 축하해 줄 때도 드디어 멋지게 홀로서기한 줄 알았는데 겨우 등치만 키웠다. 철없이 첨벙 대기 바빴던  생각이 얼마나 얕았는지 알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숫자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은연중에 거드름 피우고 있었다. 삼십  넘도록 가족으로 부대끼며 산 햇수만 믿고 다 안다고 착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했던 것이 너무 창피해 보이지 않는 손이 다녀간 수를 어림하다 금세 숙연해졌다. 거들먹대던 마음 자세를 고쳐 잡고 형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다 독립해 사는 지금에 감사했다.





  혼자 나와 독립한 덕분에 모르고 지나칠 뻔한 마음발견했으니 아주 큰 수확이었다. 네 식구에서 하나로 줄었는데 오히려 배움을 얻었다. 나에게 뺄셈은 내 손에 쥔 네 개의 사과 중 하나만 남기는 것이라 그저 손해를 뜻했는데, 세 식구와 떨어져 혼자가 되면서 이런 배움의 시간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뺄셈이라고 해서 무조건 빠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빼고 덜어낸 자리에 새로운 깨달음을 더했으니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늘었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 4 빼기 3으로 곱절의 수를 얻을 줄이야. 수학은 젬병이었던 나에게는 삶에 정해진 공식과 답이 없다는 것이 위안이다. 뺄셈 끝에 손에 쥔 것이 하나 뿐이라도 그 하나가 절로 불어날 수도 있고, 몽땅 다 빼고 난 빈자리를 어떤 무엇이 채울지 모르는 일이다.



  하마터면 더 오래 무심한 철부지로 살 뻔했다. 혼자 살기로 결심하고 나온 덕분에 값진 깨달음을 얻었으니 아빠 말처럼 나만의 공간을 꾸리고 살기 시작한 날을 독립 기념일이라고 칭하 것이 거창하기만 한 말은 아닌 듯하다. 벌써 일 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독립기념일'을 정해두고 나의 온건한 독립을 위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애써 길러주신 어버이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련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순간이
언젠가 또다시 반짝이며 눈에 들어올 테니.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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