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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Oct 30. 2022

마음의 저장공간을 확보하세요

용량이 차면 백업이 중단됩니다


  찰나의 계절이라 불리는 가을이 왔다. 붉게 물든 단풍잎과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하늘, 환하게 부서지는 햇살까지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아, 풍경을 눈으로만 담기 아쉬워 사진을 찍기 바빴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고 저장하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왔다.



'저장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용량이 차면 백업이 중단됩니다.'



  본래 쓰던 핸드폰을 새로운 기종으로 바꾸면서 갤러리에 저장되는 사진들을 스토리지에 자동 백업하도록 설정했는데 용량이 거의 다 찬 모양이었다. 경고 메시지도 무시하고 그냥 촬영을 지속했더니, 이내 불필요한 사진 파일을 삭제해서 저장공간을 확보하라는 추가 알림이 울렸다. 그리고는 현재 가장 많은 용량을 차지하고 있는 파일 목록을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기록하며 백업하고 싶다면 그중 얼마는 반드시 비워야만 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이렇게 바깥공기를 쐬며 풍경을 감상하고 환기시키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요 며칠 내 머릿속이 꼭 저장공간 없는 스토리지 같았다. 아침이 오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지는 일처럼 별다른 계기 없이 들떴던 마음이 착 가라앉고 다 잘될 거라는 자신감으로 힘차게 시작하던 하루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흐물거렸다.



  매일 아침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출근하고 또 퇴근해서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잠드는 쳇바퀴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단번에 나를 압도한 무력감은 아직 겪어보지 않은 내일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일은 오늘의 일기를 그대로 베껴 쓴 것처럼 똑같이 반복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 대단한 것 없는 지질한 일상이 미래에도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니 물먹은 솜뭉치처럼 온몸이 축 늘어지는 듯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나날이 지속되던 어떤 날, 본가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반려견이 췌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이었다. 진찰 결과, 먹이 이외에 지방을 많이 섭취한 탓에 염증 수치가 높아졌고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수액을 맞으며 경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병원에서 보내온 동영상 속 반려견은 한쪽 다리에 주삿바늘을 꽂고 수액을 맞고 있었는데 지난 주말 본가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수척한 모습이었다.



  부모님은 이제껏 사료 대신 사람 밥 같이 나눠 먹던 똥개들밖에 길러 본 적 없었다. 정해진 사료만 먹이도록 주의를 줘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반려견을 외면하지 못하고 종종 나눠 먹었던 것이 독이 된 셈이었다. 결국 주인이 주는 먹이를 모두 받아먹다가 탈이 난 것이다. 다행히 사흘 만에 차도를 보여 지금은 퇴원해서 통원치료를 하기로 했지만 반려견의 보호자로서 아이를 건강하게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했다.



  자기 주인이 나쁜 것을 준다고는 생각지 않고 그대로 받아먹다가 탈이 나 아픈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좀 더 좋은 주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들던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나 자신에게 좋은 주인일까.'



불필요한 지방을 많이 섭취해서 탈이 난 반려견과 요 며칠 불필요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느라 풀 죽은 내 마음이 꼭 닮아 있었다. 반려견의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느꼈던 것처럼 그동안 살뜰히 살피지 못해 수척해진 내 마음에게도 미안해졌다.



  그때 잊고 있었던 인디언 속담이 떠올랐다. 마음속에 매일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가 싸우는데, 둘 중 이기는 쪽은 힘센 늑대가 아니라 '내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다'라고 했던 이야기. 속담의 의미를 곱씹으며 무기력했던 날들을 되돌아보니 변한 것은 내 마음뿐이었다.



  먹고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쉬는 일상의 사이클에는 아무 균열이 없고 보통 사람들처럼 적당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어느 날 갑자기 고꾸라진 마음뿐이었다. 어느 하나 이룬 것이 없는 것 같고 그 무엇도 잘하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나와는 다르게 남들은 잘만 사는 것 같고 이대로 살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 불행의 끝말잇기는 평온하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어떻게든 등치만 불릴 생각으로 선한 것 나쁜 것 구별 없이 삼켜 무턱대고 몸집을 키운 것이 하필 악한 늑대였음을 알았다.





  결국 스스로 등치를 불릴 수 있도록 먹이를 주면서 악한 늑대가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꼴이니 모든 마음의 결과는 내가 자초한 결과였다. 매 순간 살면서 알게 모르게 했던 자잘한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인 줄도 모르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마음을 나무랐다. 우리 집 반려견이 그러했듯이 마음도 주인인 내가 구별 없이 먹이를 주는 바람에 탈이 난 것이었다.



  마음속에 꽉 찬 악한 늑대를 잠잠하게 하는 것 또한 내 몫이었다.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의 등치가 역전될 때까지 선한 늑대에게 꾸준히 먹이를 줘야 했고 몸집을 불린 악한 늑대는 속이 텅 빌 때까지 굶겨야 했다. 앞서 말했던 핸드폰 스토리지에 저장공간을 확보하는 일처럼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히 비우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꽉 찬 머릿속을 정리해 꼭 기억해야 할 것들만 기억할 수 있도록 백업 공간을 마련해 두어야 했다.



  나는 내 마음에게 어엿한 주인이므로. 이번처럼 선한 마음이 구석자리로 내몰려 쭈그리거나 웅크려 앉는 일 없이, 두 발 쭉 뻗고 완전히 눕고 일어날 수 있도록 부단히 살펴 마음의 곳간을 넓히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머리든 마음이든 담아둘 곳이 없으면
저장하지 못하고
바닥에 쏟기 마련이니까.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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