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자잘한 것들이었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침대 맡을 파고드는 따스한 햇살이나, 초저녁 창밖으로 비에 젖은 비릿한 흙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거나 하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사랑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내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할 때도 우직하게 선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해냈다.
내가 사랑한 그 자잘한 것들은 늘 제 속도로 흘렀다. 어떠한 연유로든 결코 서두르거나 늑장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흐트러짐 없이 동(東)에서 떠서 서(西)로 저물고, 늘 그맘때 빛이 물러가고 어둠이 드리웠다. 수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애가 타거나 늘어진 쪽은 언제나 나였다. 어떤 날은 내 마음도 모르고 빨리 흘러 서운했고, 또 어떤 날은 고된 나를 알면서도 한없이 더디 흘러 가혹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변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나인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네게서 일어나고 네게서 사라진 것처럼 모든 탓을 너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내가 사랑한 그 모든 자잘한 것들은 소리도 낼 줄 몰라, 묵묵히 싹을 틔우거나 꼿꼿하던 갈대 허리를 숙이는 게 전부였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핑계 삼아 수군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일 때도 있었으나, 잠 한숨 자고 나면 너는 다시 어제처럼 자기 자리를 지켰다.
내 스스로 자잘하다 생각한 모든 것들은 일정한 궤를 지켜 흘렀고, 매일 켜켜이 쌓여 거대한 풍경을 이루었다. 초록의 싹을 틔우고 수줍게 오므린 봉오리가 색색의 잎으로 흐드러지게 피던 순간마저도, 거르는 일 없이 부지런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켰다. 눈 안에 담긴 너의 모든 일상은 언제나 한결같은 풍경으로 흘렀다. 뚜렷한 계절의 옷을 입고서 나의 생의 계절을 함께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문득 얼굴을 드리우는 햇살이나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새소리에, 형언하지 않아도 너의 목소리가 수 개의 언어로 들리는 듯했다. 눈 안의 풍경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물러날 때도, 작별인사도 없이 뒷모습만 보였으나 언제고 돌아와 제 속도로 흘렀다. 자연히 난 자리를 보고도 너의 든 자리를 그리게 만든 이유였다.
너는 언제고 나의 속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길을 가다 멈춰서 가만히 달의 낯을 보고,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속삭일 때도 너는 자리를 뜬 적 없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며 그 하루의 너를 배웅할 때도, 너는 아침보다 더 따스한 빛으로 물들인 노을로 나를 다독였다.
한동안 너를 잊고 지내다 고개를 들었을 때도, 너는 기꺼이 그곳에 머물러주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보여 자잘하다고 생각한 너는 내가 가늠할 수도, 형언할 수도 없이 실로 큰 존재였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자잘하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때로는 빛으로, 바람으로 어떤 날은 빗방울로 나를 찾아와 언제고 곁을 지키는 네가 익숙해진 탓이었다. 급하지도 더디지도 않게 늘 제 속도에 맞춰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성실한 일인 줄도 모르고 내 눈이 담는 크기만큼 너를 자잘하다고 속단했다.
하루 24시간 중에 너를 마주하기 위해 단 한 시간도 내어준 적 없으면서. 기껏해야 고작 몇 번의 눈길이 전부였던 날이 더 많았음에도 너를 다 안다고 자만하던 내 탓이었다.
참 감사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다. 내가 뜻하지 않게 생의 오르막길을 걷고 예고 없이 내린 비에 온몸이 흠뻑 젖어도, 느닷없이 부는 바람에 코끝이 시리도록 체온이 떨어진 날에도 너는 언제나 곁을 지키는 것으로 나를 위로했다.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감히 내가 그릴 수도 없는 거대한 그림이었다. 한 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 늦잠 한 번 잔 적 없이 제 자리를 채워온 대단한 경치였다.
매일 저녁 하늘을 붉게 수놓는 노을과 내가 걷는 걸음마다 따라 걷는 달은 결코 자잘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고된 하루를 살아낸 스스로에 대한 작지만 큰 위로였다. 하루를 끝마치고 무사히 돌아온 집처럼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마음이자 오늘 하루도 썩 괜찮았다는, 단 한 번도 쉰 적 없는 토닥임이었다. 너무도 당연해 익숙함에 속아 바로 볼 줄 몰랐을 뿐.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실로 대단하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멈춰 서서 진득한 시선을 너에게 두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들은 오늘도 내일도 틀림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내 스스로를 다독여줄 것이므로. 군말 없이 내 곁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말 대신 눈길로 전하는 최소한의 애정표현이자 하루 끝에, 내가 할 수 있는 사소한 고백이다.
달에게 배운다
/ 담쟁이캘리
어느새 가까워 온 섣달 그믐날 돌이켜보니 열두 달 내리 어둠만 헤아리느라 일자(日字) 헤아릴 새 없는 날을 보냈다
매일 아침 새 마음 새 뜻으로 밤마다 우물가에 앉아 물을 길어내도 깊은 수심은 마를 틈 없이 차고 넘쳤다
습관처럼 다잡던 마음도 속절없이 늘어진 밤의 시간 앞에서 아침인지 밤인지, 갈피 잡을 새 없이 휘청였다
초하루부터 말일까지 동지섣달 끝 모르고 늘어진 밤 끝까지 곤두박질친 마음이 외딴 방 어둠 위로, 덩그러니 떴다
제 아무리 밝다 해도 두문불출 낯을 감추고 싶은 순간이 있는 거라고, 어둔 밤 홀로 선 너를 보다 알았다
말동무 하나 없이 매일 밝은 낯 보여야 하는 그 변치 않음이 가여워 무언의 눈길로 너를 달랬다
그림자라도 지면 짐작이나 할 텐데 늘 밝은 너는, 언제고 잠잠해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노라고 어둔 길 위에 밤새 널 세워두고 맘 편히 잠든 나를 탓했다
둥글둥글한 너는 속도 없어 잠시 머문 내 눈길이 뭐 좋다고, 졸졸 강아지처럼 따라다니기 바쁜지
초승 날부터 그믐 때까지 변화무쌍한 하루를 보내고도 보름이면 밝은 낯으로, 짙은 어둠 속 초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너를 보며 갖은 감정에도 주기가 있음을 알았다
제 아무리 어둡다 해도 휘영청 빛을 비추고야 마는 순간이 오는 거라고, 어두운 밤 홀로 뜬 달을 보며 배웠다